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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1920년대

기원

김소월 · 1920년대
저 행길을 사람 하나 차츰 걸어온다, 너풋너풋 흰 적삼 흰 바지다, 빨간 줄 센 하올 목에 걸고 오는 것만 보고라도 누군고 누군고 관심하던 그 행여나 이제는 없다, 아아 내가 왜 이렇게 되었노! 오는 공일날 테니스 시아이, 반공일날 밤은 웅변회 더워서 땀이 쫄쫄 난다고 여름날 수영 춥디추운 겨울 등산, 그 무서운 이야기만 골라가며 듣고난 뒤야 집으로 돌아오는 시담회의 밤! 호기도 용기도 인제는 없다. 아아 내가 왜 이렇게 되었노! 동양 도―교―의 긴자는 밤의 귀속 잘하는 네온사인 눈띄 좇아가고 싶어, 아무렇게라도 해서 발 편하고 볼씨 있는 여름 신 한 켤레 사야만 된다 벌어서 땀 흘리고 남은 돈, 그만이나, 친구 위해 아끼우고 말던 웃기기도 선뜻도 인제는 없다, 아아 내가 왜 이렇게 되었노! 컵에는 부랏슈와 라이옹, 대야에 사봉 담아들고 뒤뜰에 나서면, 저 봐! 우물지붕에 새벽달. 몸 깨끗이 깨끗이 씻고, 단정히 꿇어앉아 눈 감고 빌고 빌던 해 뜨도록 비난수를 내 마음에다 도로 줍소사! 아아 내가 왜 이렇게 되었노!

주석

공일날 / 반공일 공일은 일하지 않고 쉬는 날(일요일), 반공일은 반나절만 일하는 날(토요일).

시아이 ‘시합(試合)’의 일본식 발음 표기.

긴자(銀座) 일본 도쿄의 번화가. 1920년대 근대 도시 문물의 상징.

네온사인 네온등으로 만든 광고 조명. 근대 도시의 화려함을 나타낸다.

부랏슈 / 라이옹 / 사봉 각각 brush(칫솔), Lion(일본의 치약 상표), savon(비누)의 외래어 표기.

볼씨 볼품, 겉으로 보이는 모양새.

비난수 무당이 귀신에게 비는 말이나 정성. 여기서는 간절히 빌던 마음·정성을 뜻한다.

줍소사 ‘주소서’의 옛 기원형 종결. 간절한 청을 담은 표현.

심상·해설

근대 도시의 화려한 네온과 일상에 휩쓸려 옛 호기와 정성을 잃은 자신을 돌아보며, 새벽달 아래 무릎 꿇고 잃어버린 마음을 되돌려 달라 비는 자책의 장면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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