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비극
비극(悲劇)의 힌얼굴을 뵈인적이 있느냐?
그손님의 얼골은 실로 미(美)하니라.
검은 옷에 가리워 오는 이 고귀(高貴)한 심방(尋訪)에 사람들은 부질없이 당황(唐慌)한다.
실상 그가 남기고 간 자최가 얼마나 향(香)그럽기에
오랜 후일(後日)에야 평화(平和)와 슬픔과 사랑의 선물을 두고 간줄을 알었다.
그의 발옴김이 또한 표범의 뒤를 따르듯 조심스럽기에
가리어 듣는 귀가 오직 그의 노크를 안다.
묵(墨)이 말러 시(詩)가 써지지 아니하는 이 밤에도
나는 맞이할 예비가 있다.
일즉이 나의 딸하나와 아들하나를 드린일이 있기에
혹은 이밤에 그가 예의(禮儀)를 가추지 않고 오량이면
문밖에서 가벼히 사양하겠다!
주석
심방(尋訪) 찾아가서 방문함. 여기서는 '비극'이라는 손님이 사람을 찾아오는 일을 가리킨다.
묵(墨)이 말러 먹이 말라. 글을 쓰는 먹물이 마를 만큼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시를 짓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비극의 흰 얼굴 비극을 검은 옷에 흰 얼굴의 고귀한 손님으로 의인화한 것으로, 죽음 또는 운명적 슬픔을 상징한다. 자식을 잃은 시인의 체험이 깔려 있다.
심상·해설
검은 옷에 흰 얼굴을 한 손님이 표범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문을 두드리는, 먹빛 어두운 밤의 정적과 죽음의 기척이 서늘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