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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프
1930년대

람프

정지용 · 1930년대
램프에 불을 밝혀 오시오. 어쩐지 램프에 불을 보고 싶은 밤이외다. 하이얀 갓이 연(蓮)잎처럼 아래로 수그러지고 다칠세라 끼워 세운 등피하며 가지가지 만듦새가 모두 지금은 고풍(古風)스럽게 된 램프는 걸려 있는 것보다 앉은 모양이 좋습니다. 램프는 두 손으로 받쳐 안고 오는 양이 아담합니다. 그대 얼굴을 농담(濃淡)이 아주 강(强)한, 옮겨 오는 회화(繪畵)로 감상(鑑賞)할 수 있음이외다. ─ 딴 말씀이오나 그대와 같은 미(美)한 성(性)의 얼굴에 순수(純粹)한 회화(繪畵)를 재현(再現)함도 그리스도교적(敎的) 예술(藝術)의 자유(自由)이외다. 그 흉측하기가 송충(松虫)이 같은 석유(石油)를 달아 올려 종잇빛보다도 고운 불이 피는 양이 누에가 푸른 뽕을 먹어 고운 비단을 낳음과 같은 좋은 교훈(敎訓)이외다. 흔히 먼 산모퉁이를 도는 밤 기적(汽笛)이 목이 쉴 때 램프불은 적은 무리를 둘러쓰기도 합니다. 가련(可憐)한 코스모스 위에 다음 날 찬비가 뿌리리라고 합니다. 마을에서 늦게 돌아올 때 램프는 수고롭지 아니한 고요한 정열(情熱)과 같이 자리를 옮기지 않고 있습니다. 마을을 찾아 나가는 까닭은 막연(漠然)한 향수(鄕愁)에 끌리어 나감이나 돌아올 때는 가벼운 탄식(嘆息)을 지고 오는 것이 나의 일지(日誌)이외다. 그러나 램프는 역시 누구 얼굴에 향한 정열(情熱)이 아닌 것을 보았습니다. 다만 흰 종이 한 겹으로 이 큰 밤을 막고 있는 나의 보금자리에 램프는 매우 자신(自信) 있는 얼굴이옵디다. 전등(電燈)은 불의 조화(造花)이외다. 적어도 등(燈)불의 원시적(原始的) 정열(情熱)을 잊어버린 가설(架設)이외다. 그는 위로 치오르는 불의 혀 모양이 없습니다. 그야 이 심야(深夜)에 태양(太陽)과 같이 밝은 기공(技工)이 이제 나오겠지요. 그러나 삼림(森林)에서 찍어 온 듯 싱싱한 불꽃이 아니면 나의 성정(性情)은 그다지 반가울 리 없습니다. 성정(性情)이란 반드시 실용(實用)에만 기울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이외다. 그러므로 예전에 아시시오 • 성(聖) 프란시스코는 위로 오르는 종달새나 아래로 흐르는 물까지라도 자매(姉妹)로 불러 사랑하였으나 그중에도 불의 자매(姉妹)를 더욱 사랑하였습니다. 그의 낡은 망토 자락에 옮겨 붙는 불꽃을 그는 사양치 않았습니다. 비상(非常)히 사랑하는 사랑의 표상(表象)인 불에게 흔한 베 쪽을 아끼기가 너무도 인색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인(聖人)의 행적(行蹟)이라기보다도 그리스도교적(敎的) 포에지(Poesie)의 출발(出發)이외다. 램프 그늘에서는 계절(季節)의 소란(騷亂)을 듣기가 좋습니다. 먼 우레와 같이 부서지는 바다며 별같이 소란한 귀뚜라미 울음이며 나무와 잎새가 떠는 계절(季節)의 전차(戰車)가 달려옵니다. 창(窓)을 사납게 치는가 하면 저으기 부르는 소리가 있습니다. 귀를 강동그리어 이 괴한 소리를 가리어 들으렵니다. 역시 부르는 소리외다. 램프불은 줄어지고 벽시계(壁時計)는 금시에 황당하게 중얼거립니다. 이상하게도 나의 몸은 마른 잎새같이 가벼워집니다. 창(窓)을 넘어다보나 등(燈)불에 익은 눈은 어둠 속을 분별키 어렵습니다. 그러나 역시 부르는 소리외다. 램프를 줄이고 내어다보면 눈자위도 분별키 어려운 검은 손님이 서 있습니다. 「누구를 찾으십니까?」 만일 검은 망토를 두른 해골이 서서 부르더라고 하면 그대는 이러한 불길(不吉)한 이야기는 기피(忌避)하시리다. 덧문을 굳이 닫으면서 나의 양식(良識)은 이렇게 해설(解說)하였습니다. ─ 죽음을 보았다는 것은 한 착각(錯覺)이다 ─ 그러나 「죽음」이란 벌써부터 나의 청각(聽覺) 안에서 자라는 한 항구(恒久)한 흑점(黑點)이외다. 그리고 나의 반성(反省)의 정확(正確)한 위치(位置)에서 내려다보면 램프 그늘에 차곡 접혀 있는 나의 육체(肉體)가 목이 심히 말라 하며 기도(祈禱)라는 것이 반드시 정신적(精神的)인 것보다도 어떤 때는 순수(純粹)히 미각적(味覺的)일 수도 있어서 쓰디쓰고도 달디단 이상한 입맛을 다십니다. 「천주(天主)의 성모(聖母) 마리아는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 아멘」

주석

등피(燈皮) 등불이 꺼지지 않게 바람을 막고 불빛을 밝게 하려고 남포등에 씌우는 유리 통.

포에지(Poesie) 시 또는 시정신을 뜻하는 프랑스어. 산문에 어린 시적 정취를 이른다.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 이탈리아 아시시 출신의 가톨릭 성인(1182~1226). 해와 달, 불과 물 등 자연 만물을 형제자매로 부르며 사랑한 '태양의 찬가'로 유명하다.

조화(造花) 종이·천 따위로 만든 가짜 꽃. 여기서는 전등을 진짜 불이 아닌 인공의 불에 빗댄 말이다.

천주(天主)의 성모(聖母) 마리아 기도 가톨릭 '성모송'의 끝 구절. 죽음을 예감한 화자가 외는 기도이다.

심상·해설

흰 갓이 연잎처럼 수그러진 고풍스러운 램프 불빛 아래 깊은 가을밤을 보내며, 숲에서 갓 찍어 온 듯 싱싱한 불꽃과 위로 오르는 불의 혀를 사랑하다가, 문득 검은 망토를 두른 죽음의 환영을 마주하고 성모송을 외는 종교적 명상이 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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