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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1930년대

릴케

박용철 · 1930년대
깊이 떨어진다 멀리선 듯 떨어져 하늘 위 딴 동산이 말라가는 듯 부정하는 몸짓으로 떨어진다. 그래 밤이면 무거운 땅은 모두 별 사이에서 고독 가운데로 떨어진다. 우리 다 떨어진다 이 손도 떨어지고 다른 데를 보라 어디는 그게 없나. 그러나 한 분이 있어 이 떨어짐을 끝없이 부드러이 그 손 안에 받혀준다. ○ 마리아 당신이 우심을—내가 압니다 나도 울고 싶습니다 당신을 위해 이마를 돌에 닿이고 울겠습니다. 당신의 손은 뜨겁습니다 내가 그 아래 건반을 밀어 넣을 수 있다면 당신의 노래가 하나 남을 것을 그러나 시간은 유언장도 없이 죽습니다. ○ 우리의 어머니들은 이미 피로하여서 우리가 (조심스레) 걱정되어 독촉하면 저희는 두 손을 늘어트리고 먼 데 소리(響)를 믿고 있습니다, 오— 우리도 꽃피었더니라! 저희가 흰옷으로 가까이 가면 우리는 그것을 빨리 찢어버립니다 먼지 많은 실내의 광선 가운데서, 저희는 그렇게 열심히 애를 쓰면서도 우리의 뜨거운 손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그들을 가르쳐야 됩니다 어머니가 다시 눈을 뜨지 않을 때에 그러면 그들은 밤에 두 줄 하얀 불길과 같이 올라가오리다. ○ 먼저 나는 당신의 정원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 넌출진 풀과 화단으로 당신의 아름다움을 가릴 수 있으면 당신은 어머니답게 피로하신 미소를 띠우시고 즐겨 나를 찾으시리다. 그러나 당신이 가고 오실 때에 무엇이 함께 거기를 들어옵니다 당신이 한 화단에서 나를 눈짓하실 때에 그것은 붉은 화단에서 소리쳐 나를 부릅니다. ○ 보시옵소서 우리의 날은 이리 좁고 밤의 침실에는 불안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붉은 장미를 바라고 변함없이 손을 내어 밉니다. 마리아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로우셔야 해요 당신의 피 속에서 피어난 우리 당신이 아니시면 누가 알겠습니까 동경이 얼마나 마음 아픈 것인가를, 참말 소녀의 가슴의 이러한 아픔을 당신은 몸소 지나보셨습니다 성탄 때의 눈과 다름없는 이 마음은 그러나 온통 불타고 있습니다.— ○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하시옵소서! 보시오 우리가 얼마나 생활을 바라고 떨고 있는가? 우리는 높이 오르고저 하나이다. 광휘와 같이 노래와 같이. ○ 많은 것에서 의미가 우리에게 남았습니다. 특히 부드러운 것과 아담한 것에는 우리는 약간 아는 것이 있습니다 남모르는 그 정원이라든가 잠든 아래 밀어 넣어 주는 우단 베개라든가 미혹시키는 애정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는 그 무엇이라든가 그러나 많은 말씀은 그 의미로부터 이 세계로부터 달아나서 당신의 옥좌의 주위에 올라가는 음계를 싸듯이 귀 기울이며 둘러쌓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여 당신의 아들은 그걸 보고(말씀) 웃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보시옵소서

주석

릴케 독일어권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박용철이 그의 시를 옮겼으며, 첫 시는 '가을(Herbst)', 뒤이은 '마리아' 연작은 '마리아의 생애' 계열의 종교시다.

가을(낙엽이 떨어진다) 첫 시는 릴케의 명편 'Herbst'. 잎이, 손이, 온 땅이 끝없이 떨어지지만 그 모든 떨어짐을 한없이 부드럽게 받쳐주는 '한 분'(신)을 노래한다.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 뒤의 연작은 마리아에게 바치는 기도 형식으로, 소녀들의 그리움과 동경을 마리아의 자비에 호소한다.

건반(鍵盤) 악기의 건반. 마리아의 뜨거운 손 아래 건반을 밀어 넣으면 그 노래가 남으련만, 시간은 유언도 없이 사라진다는 안타까움을 담는다.

옥좌(玉座) 임금이나 천상의 존재가 앉는 자리. 여기서는 천상의 마리아가 앉은 보좌를 가리킨다.

심상·해설

잎도 손도 온 땅도 고독 속으로 끝없이 떨어지지만 한 분의 손이 그 낙하를 부드럽게 받쳐주는 가을밤의 이미지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그리움과 불안을 호소하는 소녀들의 기도로 이어지는 종교적 명상이 깊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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