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
1920년대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

이상화 · 1920년대
오랜 오랜 녯적부터 아, 몇 백(百)년 몇 천(千)년 녯적부터 호미와 가래에게 등살을 빗기우고 감자와 기장에게 속 기름을 빼앗기인 산촌(山村)의 뼈만 남은 땅바닥 우에서 아직도 사람은 수확(收穫)을 바라고 잇다. 게으름을 빚어내는 이 느진 봄날 「나는 이렇게도 시달렸노라……」 돍맹이를 내보이는 논과 밧― 거기에서 조으는 듯 호미질하는 농샤짓는 사람의 목숨을 나는 본다. 마음도 입도 없는 흙인 줄 알면서 얼마라도 더 달나고 정성끗 뒤지는 그들의 가슴엔 저주를 바들 숙명(宿命)이 주는 자족(自足)이 아직도 잇다. 자족(自足)이 식힌 굴종(屈從)이 아직도 잇다. 한울에도 게으른 흰구름이 돌고 땅에서도 고달픈 침묵(沈默)이 까라진 오- 이런 날 이런 때에는 이 땅과 내 마음의 우울(憂鬱)을 뿌술 동해(東海)에서 폭풍우(暴風雨)나 소다저라- 빈다. ―「순찬(遁竄)의 선물」에서―

주석

등살을 빗기우고 '등살'은 등에 있는 살. 호미와 가래로 땅을 갈 듯, 사람의 등이 도구에 깎이고 빗기우는 고된 노동을 형상화한 표현이다.

속 기름을 빼앗기인 몸속 기름(정기·진액)을 다 빼앗겼다는 뜻. 감자·기장 농사에 진을 다 쏟아 메마른 땅과 농민의 처지를 함께 가리킨다.

자족(自足) / 굴종(屈從) '자족'은 제 처지에 스스로 만족함, '굴종'은 굽혀 복종함. 가난한 숙명을 운명으로 받아들여 체념·순응하는 농민의 태도를 비판적으로 짚은 말이다.

둔찬(遁竄)의 선물 이상화의 미발표 시 묶음 이름. 원문의 '순찬'은 '둔찬(遁竄)'의 오기로 보이며, '둔찬'은 세상을 피해 달아나 숨음을 뜻한다.

심상·해설

몇천 년 메말라 뼈만 남은 산촌의 땅에서, 졸 듯이 호미질하며 체념과 굴종을 운명처럼 받아들인 농민들의 고단한 삶이 펼쳐진다. 게으른 흰구름과 고달픈 침묵이 짓누르는 그 땅에, 모든 우울을 쓸어버릴 폭풍우가 동해에서 쏟아지기를 비는 격정이 솟구친다.

이상화의 다른 작품

비슷한 심상의 다른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