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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1940-1950년대

제3장

조기천 · 1940-1950년대
1 머나먼 옛날 맥두산 포수막이 잣솔밭에 숨어 있는 곳- 소리개 많다 하여 솔개골, 허나 그렇게 많던 소리개도 그림자까지 찾을 길 없어지고 사발봉 위엔 외까마귀 앉아 두메를 하소연하듯 울고만 있어라! 옛날엔 범 잡는 포수들이 저녁이면 모닥불 옆에 모여앉아 내일의 희망을 떳떳이 그리며 화승대 닦고 창끝 버렸으리! 그러나 조상의 녹슨 화승대도 귀뿌리 어루만지며 주재소에 바치고 포수의 후손들은 검둥이 화전농이 되었다. 2 세상에서 떨어져나간 솔개골- 이 마을에 김윤철이 산다. 피투성이 ≪3.1≫을 다시 맞은 해 봄 아내도 놈들의 뭇매에 죽고 의병들도 두만강 건넜을 제 참나무통에 의의 총 감추고- 품팔이로 이곳저곳- 몇 해인가 보내다가 이 솔개골에 화전농이 되었다. 혜산에 있는 어린 딸 데려다가 분노도 희망도 두메의 흙속에 묻고 그날그날 보내더니 지난해 어느 때부터 새 희망 새 힘 얻었다. 그것은 솔개골에 이런 전설 돌던 때- ≪백두산 속엔 크나큰 굴, 해도 달도 있고 별도 반짝이는 넓으나 넓은 굴 있는데 그 속에선 용사 수만이 장검을 간다고, 장검을 바윗돌에 갈면서 영 내리기만 기다린다고, 때가 되면 영이 내리고, 영만 내리면 석문이 쫘악 열리고 석문만 열리면 용사들이 벼락같이 쓸어나오고 용사들만 쓸어나오면 이 땅에 해방전이 일어난다고 일제를 쳐부수리라고-≫ 이때부터 꽃분이도 철호의 지도 받았고 이때부터 백두산을 바라보면 마르고 쪼들린 마음속에 오월의 대하인 양 격랑이 도도 3 백두산! 백두산! 너, 세기의 증견자야! 칭기스칸의 들띄우는 말발굽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피묻은 칼도 너의 가슴에 잊히지 않은 상처를 남겼고 오백년 왕업도 사신의 두 어깨에 치욕의 짐이 되어 너의 등골에 모멸의 발자국 치며 해마다 압록을 건너야만 될 때도 인민만은 자유의 횃불을 쳐들고 홍경래의 창기를 뒤따랐고 갑오의 싸움을 펼쳤다. 하다가 반만년 다듬기운 이 땅이 일제의 독아에 으스러질 제 백두야, 너도 가슴막히어 숙연히 머리 숙이었지! 그러나 인민만은 봉화를 일으켜 칼을 들고 의병이 일어났고 피를 들고 ≪3.1≫이 일어났다. 파업의 굴뚝에 분노 서리우고 ≪소작≫을 안고 주림이 통곡칠 때 또 송화강 물결까지도 일제의 그림자에 거칠어지고 만리장성도 놈들의 멸시에 맞아 조약돌로 뒹굴 때 이 나라의 빨치산들이 일어나 반항의 기치를 피로 물들이거니 아아, 백두야, 네 얼마나 동해의 날뛰는 파도인 양 격분에 가슴을 떨면서 바다 속 섬나라 저 원수를- 하늘 아래 한가지 못살 저 원수를 피어린 눈으로 노렸느냐! 4 꽃 같다고 꽃 분같이 희다고 분- 꽃분의 어린 때는 혜산 어느 마을에서 지냈다 솔개골로 온 지도 십여 년- 학교라곤 구경도 못한 꽃분이 허나 기나긴 겨울밤은 한글의 밤- 아버지의 가르침 받아 손싸래에 때묻고 모지라진 몇 해 전 ≪신여성≫도 쉽게 보았다. 임당수 깊은 물에 심청이를 버린 그 뱃사공들이 한없이 야속하다 눈물도 지었고 드덜기 캐면서도 신관사또 변학도의 목 베이노라 중동을 찍어 동댕이도 쳤다. 때로는 아버지의 구슬픈 이야기- 그것은 소녀의 가슴속에 세월은 흘러도 더 피어오르는 불멸의 불덩이! 5 기미년 ≪토벌≫에 돌아가셨다는 어머니- 그렇게 기다리던 보리밥도 못 받고… 어떤 때는 치받치는 어머니 생각 온 마음을 비트는 듯 조이는 듯- ≪어떻게 원수 갚을까!≫ 꽃분이 온몸 떨었다. 꿈속에라도 잠꼬대 피하려고 혀 불어 끊어 벙어리 되고 대사의 비밀을 죽음으로 감추며 고문대에 매인 채 소리없이 죽어간 그 이름모를 청년- ≪실로 그런 오빠나 있었으면!≫ 꽃분이 한숨지었다. 빨치산 남편을 천장에 감추고 놈들의 창에 찔려 죽으면서도 남편이 알면 뛰어내릴까 한마디 신음도 안 낸 그 마을 아낙네- ≪아, 나도 그러리라!≫ 남몰래 꽃분이 맹세했다! 6 산촌의 밤- 마을집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모지라빠진 뒤웅박 같은 두메의 삶이 누덕밑에서 어지러운 꿈자리 펴는 밤에도 4월의 한밤! 물레방아소리도 그쳤다- 마지막 물레방아소리… 굶주리는 마을을 조상하듯 밤새 개울물줄기 외로이 부여잡고 목놓아 흐느껴 울던 그 소리… 그래도 두메의 외딴 오막살이 한 채엔 이 밤이 삶의 밤, 투쟁의 밤- 철호와 꽃분이 마지막 선포문 찍는다. 이제 백 부만 더 찍으면 그만, 내일 아침엔 철호 떠나리 이때- 밖에서 가벼운 발자취소리- 온몸이 바늘이 돋는 듯, 보장 내린 창밖에서 수직 서던 아버지의 숨겨운 소리- ≪꽃분아! 불 꺼라!≫ 캄캄한 방안, 어느새 철호는 등사기와 선포문 안고- ≪꽃분이! 뒷문 여오!≫ 그러나 벌써 무거운 발자국소리 들렸다- 가슴을 으스러뜨리는 발자국소리. 심장이 골풀이치다 기절한 듯- 꽃분이 한자리에 서 있다 ≪나가면 체포된다!≫-머릿속에 언뜻, ≪어쩔까?≫ 순간은 천년인 듯! 7 다음 순간… 신념과 압력에 찬 꽃분의 말- ≪철호 이불 쓰고 눕소! 아버지도 정주에!≫ 어느새에 자리 펴지고 철호도 등사기도 삐라도 이불밑에 들었다. 밖에서 건방진 순사의 반말- ≪여보 영감! 자나?≫ ≪……≫ ≪이 두상 웬 잠을!≫ ≪그게 뉘기요?≫ 꽃분의 목소리 잠내 난다. 허면서도 그는 저고리 벗었다. 창문에 포장 살짝 벗기며- ≪가만 있습소… 불을 켜고…≫ ≪아뿔싸, 등잔 쏟았네!≫ (등잔은 걸린 대로 있었다) ≪에그! 석유냄새야!≫ (등사유냄새였다) 빤해진 창문에 비친 그림자- 또렷이 나타난 처녀의 젖가슴 그것은 순사의 눈뿌리 뺐다. 능청스런 꽃분의 말- ≪가만 있습소… 내 옷 입고…≫ 주섬주섬 방안에 흘려진 선포문 철호의 이불 속에 들었다. ≪나리님, 들어옵소≫ 꽃분이 문 연다. 8 ≪에잇! 냄새… 이건 누구야?≫ ≪내 저의 새서방이요…≫ ≪새서방? 너 시집 가? 계집년이 초저녁부터 끼고 누워…≫ ≪나리님두… 초저녁이라니…≫ 꽃분이 웃으며 말한다. ≪잡말 말고 두상에게 일러! 내일 아침 주재소로 오라구≫ 아니꼽게 방안을 훑어보고 휙 돌아서는 순사, 그 발자취소리도 사라졌을 때 불붙는 낯을 두 손으로 막으며 꽃분이 주저앉는다 감격에 말없이 일어선 철호에게 ≪아이고 참! 용서하옵소!≫ 머리숙이고 부엌으로 나간다. 방안에 홀로 남은 철호 감격에 떨리는 입술로 ≪꽃분동무!≫ 맘속으로 부르짖고 맘속으로 합장하고, 무릎 꿇고- ≪참다운 전우여! 이 나라의 귀여운 딸이여!≫ 밤은 깊어도 가누나 창문을 사이 두고 밤은 깊어깊어 한밤에 드누나… 이 한밤 철호 길 떠났다…

주석

제3장 장편 서사시 『백두산』(조기천, 1947)의 셋째 장. 솔개골의 내력과 김윤철·꽃분이 부녀의 사연, 순사의 야간 단속을 꽃분이의 기지로 넘기는 장면을 담는다.

화승대(火繩대) 화승총. 불 붙인 노끈으로 화약에 불을 댕겨 쏘던 옛 총.

3·1 1919년 3·1 운동. '피투성이 3·1을 다시 맞은 해'는 그 뒤 어느 해 봄을 가리킨다.

혜산(惠山) 함경남도(현 양강도)의 도시. 압록강 상류, 백두산 가까이에 있다.

칭기스칸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즈 칸. 외세의 침략을 대표하는 인물로 거론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무장. 일본의 침략을 상징한다.

홍경래(洪景來) 1811년 평안도에서 봉기를 일으킨 인물. '창기(槍旗)'는 그 봉기의 깃발로, 민중 항쟁의 상징이다.

갑오의 싸움 1894년 갑오 동학 농민 운동(동학 농민 전쟁).

신여성(新女性) 1920~30년대에 발간된 여성 잡지. 꽃분이가 한글을 익혀 읽은 책이다.

임당수/심청이 고전소설 『심청전』에서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몸을 던진 깊은 물 인당수(印塘水).

변학도 『춘향전』에 나오는 탐관오리 신관 사또. 백성을 괴롭히는 악인의 전형이다.

드덜기 도라지를 이르는 방언.

기미년(己未年)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해.

정주(鼎廚) 부엌. '정주간'이라고도 한다. 함경도 살림집에서 부엌과 방이 트인 공간을 가리키기도 한다.

선포문(宣布文) 널리 알리려고 찍어 돌리는 격문·전단.

심상·해설

솔개도 떠나 버린 외딴 화전 마을 솔개골에서, 어머니를 잃은 처녀 꽃분이가 백두산 용사 전설에 희망을 걸고, 한밤 순사의 단속을 기지로 넘기며 철호를 떠나보내는 긴장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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