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명경
여기 한 페―지 거울이 있으니
잊은 계절에서는
얹은머리가 폭포처럼 내리우고
울어도 젖지 않고
맞대고 웃어도 휘지 않고
장미처럼 착착 접힌
귀
들여다보아도 들여다보아도
조용한 세상이 맑기만 하고
코로는 피로한 향기가 오지 않는다.
만적 만적하는 대로 수심이 평행하는
부러 그러는 것 같은 거절
우편으로 옮겨 앉은 심장일망정 고동이
없으란 법 없으니
설마 그러랴? 어디 촉진(觸診)······
하고 손이 갈 때 지문이 지문을 가로막으며
선뜩하는 차단뿐이다.
오월이면 하루 한 번이고
열 번이고 외출하고 싶어하더니
나갔던 길에 안 돌아오는 수도 있는 법
거울이 책장 같으면 한 장 넘겨서
맞섰던 계절을 만나련만
여기 있는 한 페―지
거울은 페―지의 그냥 표지―
주석
명경(明鏡) 맑은 거울. 이상이 1936년 발표한 시로, 거울 속 자아에 닿을 수 없는 단절을 책장(페이지) 이미지로 변주했다.
촉진(觸診) 손으로 만져서 진찰함. 거울 속 자신의 맥(고동)을 짚어 보려는 시도를 의학 용어로 표현했다.
우편(右便)으로 옮겨 앉은 심장 거울에 비치면 좌우가 뒤집혀 심장이 오른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발상. 거울 속 자아의 반전을 가리킨다.
심상·해설
거울은 넘길 수 없는 한 장의 표지, 그 속의 얼굴은 울어도 젖지 않고 만져도 맥이 잡히지 않는다. 잊은 계절을 향해 손을 뻗지만 지문에 가로막히는, 자기 자신에게 닿지 못하는 서늘한 거울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