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보통기념
시가에 전화가 일어나기 전
역시나 나는 '뉴턴'이 가르치는 물리학에는 퍽 무지하였다
나는 거리를 걸었고 점두에 사과 산을 보면은 매일같이 물리학에 낙제하는 뇌수에 피가 묻은 것처럼 자그마하다
계집을 신용치 않는 나를 계집은 절대로 신용하려 들지 않는다 나의 말에 계집에게 낙제 운동으로 영향되는 일이 없었다
계집은 늘 내 말을 눈으로 들었다 내 말 한마디가 계집의 눈자위에 떨어져 본 적이 없다
기어코 시가에는 전화가 일어났다 나는 오래 계집을 잊었었다 내가 나를 버렸던 까닭이었다
주제도 더러웠다 때 끼인 손톱은 길었다
무위한 일월을 피난소에서 이런 일 저런 일
'우라가에시'(안팎 뒤집기) 재봉에 골몰하였느니라
종이로 만든 푸른 솔잎 가지에 또한 종이로 만든 흰 학 동체 한 개가 서 있다 쓸쓸하다
화로가 햇볕같이 밝은 데는 열대의 봄처럼 부드럽다 그 한구석에서 나는 지구의 공전 일주를 기념할 줄을 다 알았더라
주석
보통기념(普通記念)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기념. 마지막 행 '지구의 공전 일주(한 해)'를 평범하게 기념한다는 제목의 역설.
전화(戰禍) 전쟁으로 인한 재앙·피해. 도시에 일어난 난리·전란을 가리킨다.
점두(店頭) 가게 앞, 가게의 앞머리.
평과(蘋果) 사과. 뉴턴의 사과를 떠올리게 하며 '물리학에 낙제하는 머리'와 이어진다.
계집 여자를 낮추어 이르던 옛말. 여기서는 아내 또는 연인을 가리킨다.
무위(無爲)한 일월(日月) 하는 일 없이 흘려보낸 세월.
우라가에시(裏返し) 옷의 안팎을 뒤집어 다시 짓는 일본어 바느질 용어. 헌 옷을 뒤집어 새로 깁는 궁핍한 살림을 보여 준다.
심상·해설
전란이 지난 거리, 가게 앞에 산처럼 쌓인 사과와 종이로 만든 솔잎·학 한 마리가 쓸쓸히 서 있다. 햇볕처럼 밝은 화로 한구석에서 흘러간 한 해를 무덤덤하게 기념하는 가난하고 적막한 정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