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소영위제
1
달빛 속에 있는 네 얼굴 앞에서 내 얼굴은 한 장 얇은 피부가 되어 너를 칭찬하는 내 말씀이 발음하지 아니하고 미닫이를 간지르는 한숨처럼 동백꽃밭 내음새 지니고 있는 네 머리털 속으로 기어들면서 모심듯이 내 설움을 하나하나 심어 가네 나
2
진흙밭 헤매일 적에 네 구두 뒤축이 눌러 놓는 자국에 비 내려 가득 괴었으니 이는 온갖 네 거짓말 네 농담에 한없이 고단한 이 설움을 곡으로 울기 전에 땅에 놓아 하늘에 부어 놓는 내 억울한 술잔 네 발자국이 진흙밭을 헤매이며 헤뜨려 놓음이냐
3
달빛이 내 등에 묻은 거적자국에 앉으면 내 그림자에는 실고추 같은 피가 아물거리고 대신 혈관에는 달빛에 놀래인 냉수가 방울방울 젖기로니 너는 내 벽돌을 씹어 삼킨 원통하게 배고파 이지러진 헝겊 심장을 들여다보면서 어항이라 하느냐
주석
소영위제(素榮爲題) '소영(素榮)을 제목으로 삼다'라는 뜻. 흰 꽃 또는 어떤 여인(소영)을 향한 그리움과 설움을 노래한 산문시로 풀이된다.
거적자국 거적(짚으로 엮은 자리)에 눌린 자국. 가난하고 헐벗은 처지를 암시한다.
실고추 가늘게 채 썬 고추. 그림자에 어른거리는 가느다란 핏줄의 이미지로 쓰였다.
심상·해설
달빛 아래 연인의 머리칼 냄새 속으로 설움을 모처럼 심어 가고, 빗물 고인 발자국을 억울한 술잔처럼 하늘에 붓는다. 굶주려 이지러진 헝겊 같은 심장을 들여다보는, 슬프고도 환상적인 사랑의 정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