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왕거미
썩어 처진 초가 서까래 밑에
자를 대고 그려낸 듯 줄을 느리고,
코를 비비며 입맛 다시는 왕거미
얼마나 흉칙스럽게 점지되었기에
저리도 끔찍히 발은 많고도 긴가
털 돋힌 검정 사마귀 같은 화상아
저리도 못생긴 거미에게도
남 부럽잖은 한가지 재주는 있어
무지개처럼 줄을 잘도나 얽어놓았지
꽃 향내에 취한 나비, 싸대는 하루살이
떠드는 모기, 눈이 크기만한 잠자리가
끈적거리는 저 그물에 얽히기만 하면
저 놈은 소리도 없이 달려들어
단숨에 희희 동동 얽어놓고
맛나게도 뜯어 먹으리라
주석
느리고 '늘이고'의 옛 표기. 길게 늘어뜨리고.
점지되었기에 신령이 사람이나 짐승의 태어남을 미리 정해 준다는 뜻. '점지되다'는 그렇게 정해져 태어나다.
화상(畵像) 여기서는 '몰골, 꼴'을 낮잡아 이르는 말.
싸대는 '싸돌아다니는'의 준말. 여기저기 분주히 돌아다니는.
심상·해설
썩은 초가 서까래 밑에 자로 잰 듯 무지개처럼 줄을 친 흉측한 왕거미, 못생겼어도 남다른 재주로 나비와 잠자리를 단숨에 얽어 맛있게 뜯어 먹는 생존의 정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