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해방의 거리
소낙비가 퍼붓는다
우레가 우룩룩 운다
번개 번쩍인다.
어제껏 막혔다가
최후의 순간에 고민하는 계류(溪流)의 인후(咽喉)가
골로 수풀 위로 마을로 강으로
흘러 내리는 것처럼
이 골목에서도 저 골목에서도
골목쟁이마다 사람이 밀려 나온다.
어디들 숨었다가 엎디었다가 쪼구려 앉았다가
저처럼 한꺼번에 밀려 나오는고!
매맞아 죽고 짓밟혀 죽고 끌려 가고도
어디들 사람이 저처럼 남았던고!
죽은 듯 고요하던 사흑(死黑)의 거리 위로
자유의 종 하늘 울리고
해방의 외침 지축을 뒤집고
열광과 환호에 홍도(洪濤)같이 넘치는 인해(人海)
소낙비 퍼붓는다
우뢰가 우루룩 운다
번개 번쩍인다
역사적 전환, 우리는 유구(悠久)의 진리를 믿어 왔노라
그러나 이 날 이렇게 우리 앞에
쉽사리 올 줄이야! 쉽사리 올 줄이야!
누가 꿈하였으랴.
팔월 십오일 대전(大戰)의 총소리 끊치는 저녁
준열한 연합군 호령 아래에
대일본제국주의도 하릴없이 무릎을 꿇고
최후의 잔명(殘命)을 애원하여
비 맞은 쥐처럼 이 땅마저 떠나게 되었나니
인류역사를 뒤집은들
이 보담 더 통쾌한 일이 또 있으랴
통쾌! 통쾌! 만세!
우리 발목, 우리 팔목, 그리고 우리의 모가지를
독사처럼 겹겹이 감았던 쇠사슬이 풀릴 제
오오, 우리는
삼십육년 만에 처음으로 숨을 쉬었다
둥근 태양이 오랜만에 동녘 하늘에 솟고
종로 한복판에 태극기 엄연히 펄렁거린다.
땅을 끌어끌어 다시 깨질 염려 없으매
오오, 삼천만 겨레여!
힘껏 뛰어라. 뛰어라, 외쳐라. 힘껏 외쳐라.
자유! 자유!
해방!
만세! 만세! 만세!
칠십 먹은 콩나물 할머니도
대설대 휘두르며 행열의 꼬리를 따라
미칠 듯 뛰며 미칠 듯 만세 부른다.
주석
번들개 '번개'의 방언·옛말 형태이다.
계류(溪流) 산골짜기를 흐르는 시냇물.
인후(咽喉) 목구멍. 막혔던 것이 터져 나오는 통로를 비유한다.
사흑(死黑) 죽음처럼 캄캄하고 어두움. 억압받던 식민지 거리의 정적을 가리킨다.
홍도(洪濤) 큰 물결, 거센 파도.
인해(人海) 사람의 바다. 거리에 운집한 군중을 비유한다.
팔월 십오일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을 가리킨다.
삼십육년 1910년 국권 피탈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식민 지배 기간을 이른다.
대설대 기다란 담뱃대. '설대'는 담뱃대의 가운데 대를 가리킨다.
심상·해설
소낙비와 번개가 몰아치는 가운데 골목마다 사람들이 큰 물결처럼 쏟아져 나오고, 종로 한복판에 태극기가 펄럭이며 칠십 노파까지 담뱃대를 휘두르며 만세를 외치는 광복의 격동이 벅차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