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곡 폐허
오호, 동경(東京)이여,
낙일(落日)에 외싸여 대지(大地)에 엎디려 우는 옛날의 도부(都府)여,
재 속에 파묻힌 찬연(燦然)한 전당(殿堂)과 누대(樓臺)에 조사(弔辭)를 드리는 시민(市民)이여,
애닯아라 이 ‘문명(文明)의 몰락(沒落)’을 바라보는 서러운 그 눈이여,
이제는 황금(黃金)과 미인(美人)을 지키던 옛날의 기사(騎士)는
창궁(槍弓)을 내던지고 폐허(廢墟)의 제단(祭壇)을 향(向)하여 만가(挽歌)를 부르노라.
아하, 오동(梧桐)마차(馬車)에 실리어 묘지(墓地)로 향(向)하는 ‘문명(文明)의 말로(末路)’여,
미(美)와 부(富)와에 결별(訣別)치 않을 수 없던가, 오호, 동경(東京)이여,
아하, 옛날의 동경(東京)이여!
대지(大地)에 우는 소리―연기(煙氣), 화염(火焰), 피, 사람의 반역(反逆),―그래서 굴종(屈從)―발광(發狂)―홍소(哄笑)―호읍(呼泣),
아하, 동경(東京)이여! 이렇게 처참(悽慘)하게 인류(人類)의 기억(記憶)을 불살라버리는 이날을 상상이나 하였던가.
역사(歷史) 재조(再造)의 위대(偉大)한 힘 앞에 우두두 떠는 가련(可憐)한 이재(罹災)의 시민(市民)을 그려나 보았던가.
아하, 한 옛날의 영화(榮華)에 고별(告別)하는 성채(城砦)여,
대자연(大自然)의 세례(洗禮)에 오열(嗚咽)하는 시민(市民)이여!
울기를 그치고 웃기도 그만두어라,
힘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무엇이다.
그렇다 힘이다! 지나간 옛날을 탈환(奪還)함에는 오직 커다란 힘이 있을 뿐이다.
아, 인류(人類)여, 여명(黎明) 전(前)에 선 저 동경(東京)의 비장(悲壯)한 울음소리에 고요히 듣는 귀를 가져라.
―대진재(大震災) 나던 때
주석
대진재(大震災) 1923년 9월 1일 도쿄·요코하마 일대를 강타한 관동대지진. 시가지가 불타고 수십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도부(都府) 수도·큰 도시를 뜻하는 한자어.
누대(樓臺) 누각과 정자 등 높이 지은 건물.
조사(弔辭)·만가(挽歌) 조사는 죽은 이를 애도하는 글, 만가는 상여를 메고 가며 부르는 노래. 멸망한 도시를 죽은 이에 빗댔다.
창궁(槍弓) 창과 활. 무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
이재(罹災) 재해를 입음. '이재의 시민'은 재난을 당한 이재민.
재조(再造) 다시 만들어 냄. 역사를 새로 빚어 내는 거대한 힘을 뜻한다.
여명(黎明) 날이 밝아 오는 새벽빛. 새 시대의 도래를 상징한다.
심상·해설
지는 해 아래 잿더미로 변한 대도시 도쿄가 엎드려 울고, 무너진 문명을 상여처럼 묘지로 실어 가는 환영 속에서 시인이 '힘'을 외치는 장엄하고 비장한 폐허의 광경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