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어린것에게
고요한 밤 너의 자는 얼굴을 무심하고 들여다볼 때,
새근새근 쉬는 네 숨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아비의 마음은 해면(海綿)처럼 사랑에 붇(潤)는다.
사랑에 겨워 고사리 같은 네 손을 가만히 쥐어도 본다.
이 손으로 너는 장차 무엇을 하려느냐
네가 씩씩하게 자라나면 무슨 일을 하려느냐,
붓대는 잡지 마라, 행여 붓대만은 잡지 말아라
죽기 전 아비의 유언이다 호미를 쥐어라! 쇠망치를 잡아라!
실눈을 뜨고 엄마의 젖가슴에 달려 붙어서
배냇짓으로 젖 빠는 흉내를 내는 너의 얼굴은
평화의 보드러운 날개가 고이고이 쓰다듬고
잠의 신(神)은 네 눈에 들락날락하는구나.
내가 너를 왜 낳아 놓았는지 나도 모른다.
네가 이 알뜰한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너도 모르리라
그러나 네가 땅에 떨어지자 으아 소리를 우렁차게 지를 때
나는 들었다 그 뜻을 알았다. 억센 삶의 소리인 것을!
조선 사람의 피를 백대(百代)나 천대(千代)나 이어 줄 너이길래
팔다리를 자근자근 깨물고 싶도록 네가 귀엽다.
내가 이루지 못한 소원을 이루고야 말 우리 집의 업둥이길래
남달리 네가 귀엽다 꼴딱 삼키고 싶도록 네가 귀여운 것이다.
모든 무거운 짐을 요 어린것의 어깨에만 지울 것이랴
온갖 희망을 염치 없이 네게다만 붙이고야 어찌 살겠느냐
그러나 너와 같은 앞날의 일꾼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든든하구나 우리의 뿌리가 열 길 스무 길이나 박혀 있구나.
그믐밤에 반딧불처럼 저 하늘의 별들처럼
반득여라 빛나거라 가는 곳마다 횃불을 들어라.
우리 아기 착한 아기 어서어서 저 주먹에 힘이 올라라
오오 우리의 강산은 온통 꽃밭이 아니냐? 별투성이가 아니냐!
1932.9.4. 재건이 낳은 지 넉 달 열흘 되는 날
주석
해면(海綿) 스펀지. 물을 잘 빨아들여 부푸는 데서, 사랑에 흠뻑 젖어 부풀어 오르는 아비의 마음을 비유한다.
붇(潤)는다 물기를 머금어 부풀어 오른다는 뜻의 '붇는다'. 한자 '潤(불을 윤)'을 곁들여 사랑이 차오름을 나타냈다.
붓대는 잡지 마라 붓대(글 쓰는 일, 곧 지식인·문필가의 삶)는 잡지 말고 호미(농민)와 쇠망치(노동자)를 쥐라는 뜻. 글로는 식민지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시인의 뼈저린 당부다.
배냇짓 갓난아이가 잠결에 웃거나 입을 오물거리는 등 무의식적으로 하는 귀여운 몸짓.
알뜰한 세상 여기서는 반어적 표현으로, 살뜰하기는커녕 야박하고 모진 세상을 가리킨다.
업둥이 본래는 집 앞에 버려진 것을 데려다 기르는 아이를 뜻하나, 여기서는 복을 안고 들어온 귀한 아이라는 애정의 표현으로 쓰였다.
재건 심훈의 아들 이름. 시 끝에 '재건이 낳은 지 넉 달 열흘 되는 날'이라 하여 갓난 아들에게 부치는 시임을 밝혔다.
심상·해설
고요한 밤 새근거리며 잠든 갓난아들의 고사리 손을 쥐고, 붓 대신 호미와 쇠망치를 잡으라 당부하며, 이 아이가 별처럼 횃불처럼 빛나 강산을 꽃밭으로 만들기를 비는 아버지의 벅찬 사랑과 다짐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