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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1920년대

향수

정지용 · 1920년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주석

지줄대는 낮은 목소리로 자꾸 지껄이는 듯한. 실개천 물소리를 옛이야기에 빗댄다.

해설피 해가 기울어 빛이 약하고 흐릿해질 무렵, 해 질 녘의 옛말.

참하 '차마'의 옛 표기. 도저히, 아무리 해도의 뜻.

절화로 질화로. 질흙으로 구워 만든 화로.

뷔인 밭 '빈 밭', 거두고 난 텅 빈 밭.

함추름 물기가 배어 흠뻑 젖은 모양, 흠뻑.

안해 '아내'의 옛 표기.

이삭 줏던 이삭을 줍던. 거둔 뒤 떨어진 낟알을 줍던 모습.

석근 별 성긴 별, 드문드문 돋은 별. '섥다(성기다)'에서 온 말.

서리 까마귀 서리가 내릴 무렵, 곧 늦가을에 떼 지어 나는 까마귀.

심상·해설

실개천이 휘도는 넓은 벌과 해 질 녘 금빛 울음 우는 황소, 질화로 곁에 졸던 늙은 아버지, 발 벗은 아내와 이삭 줍던 들판, 성긴 별 아래 도란거리던 초라한 지붕이 차례로 떠오르며, 차마 꿈엔들 잊을 수 없는 고향의 정경이 사무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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