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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 세계
1920년대

청량 세계

이상화 · 1920년대
아침이다. 여름이 웃는다. 한 해 가운데서 가장 힘차게 사는답게 사노라고 꽃불 같은 그 얼굴로 선잠 깬 눈들을 부시게 하면서 조선이란 나라에도 여름이 웃는다. 오 사람아! 변화(變化)를 따르기엔 우리의 촉각(觸角)이 너무도 둔(鈍)하고 약(弱)함을 모르고 사라지기만 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自然)은 지혜(智慧)를 보여 주며 건강(健康)을 돌려주려 이 계절(季節)로 전신(轉身)을 했어도 다시 온 줄을 이제야 알 때다. 꽃 봐라 꽃 봐라 떠들던 소리가 잠결에 들은 듯이 흐려져 버리고 숨가쁜 이 더위에 떡갈잎 잔디풀이 까지끗지 터졌다. 오래지 않아서 찬이슬이 내리면 볕살에 다 쬐인 능금과 벼알에 배부른 단물이 빙그레 돌면서 그들의 생명(生命)은 완성(完成)이 될 것이다. 열정(熱情)의 세례(洗禮)를 받지도 않고서 자연(自然)의 성과(成果)만 기다리는 신령아! 진리(眞理)를 따라가는 한 갈래 길이라고 자랑삼아 안고 있는 너희들의 그 이지(理知)는 자연(自然)의 지혜(智慧)에서 캐온 것이 아니라 인생(人生)의 범주(範疇)를 축제(缩製)함으로써 자멸적(自滅的) 자족(自足)에서 긁어모은 망상(妄想)이니 그것은 진(眞)도 아니오 선(善)도 아니며 더우든 미(美)도 아니오 다만 사악(邪惡)이 생명(生命)의 탈을 쓴 것뿐임을 여기서도 짐작을 할 수 있다. 아 한낮이다. 이미 위로 내려 쪼이는 백금(白金)실 같은 날카로운 광선(光線)이 머리가닥마다를 타고 골속으로 스며들며 마음을 흔든다 마음을 흔든다.- 나뭇잎도 번쩍이고 바람결도 번쩍이고 구름조차 번쩍이나 사람만 홀로 번쩍이지 않는다고-. 언젠가 우리가 자연(自然)의 계시(啓示)에 충동(衝動)이 되어서 인생(人生)의 의식(意識)을 실현(實現)한 적이 조선의 기억(記憶)에 있느냐 없느냐? 두더지같이 살아온 우리다. 미적지근한 빛에서는 건강(健康)을 받기보담 권태증(倦怠症)을 얻게 되며 잇닿은 멸망(滅亡)으로 나도 몰래 넘어진다. 살려는 신령들아! 살려는 네 심원(心願)도 나무같이 뿌리깊게 땅속으로 얽어매고 오늘 죽고 말지언정 자연(自然)과의 큰 조화(調和)에 나누이지 말아야만 비로소 내 생명(生命)을 가졌다고 할 것이다. 저녁이다. 여름이 성내었다 여름이 성내었다. 하늘을 보아라 험상스런 구름 떼가 빈틈없이 덮여 있고 땅을 보아라 분념(忿念)이 꼭대기로 오를 때처럼 주먹 같은 눈물이 함박으로 퍼붓는다. 까닭 몰래 감흥(感興)이 되고 답답하게 무더우나 가슴속에 물기가 돌며 마음이 반가웁다. 오 얼마나 통쾌(痛快)하고 장황(張惶)한 경면(景面)인가! 강(江)둑이 무너질지 땅바닥이 갈라질지 의심과 주저도 할 줄을 모르고 귀청이 찢어지게 소리를 치면서 최시(最始)와 최종(最終)만 회복(恢復)해 보려는 막지 못할 그 일념(一念)을 번갯불이 선언(宣言)한다. 아, 이 때를 반길 이가 어느 누가 아니랴마는 자신(自身)과 경물(景物)에 분재(分在)된 한 의식(意識)을 동화(同和)시킬 그 생명(生命)도 조선아 가졌느냐? 자연(自然)의 열정(熱情)인 여름의 변화(變化)를 보고 불쌍하게 무서워만 하는 마음이 약(弱)한 자(者)와 죄과(罪果)를 가진 자여 사악(邪惡)에 추종(追從)을 하던 네 행위(行爲)의 징벌(懲罰)을 이제야 알아라. 그러나 네 마음에 뉘우친 생명(生命)이 굽이를 치거든 망명되게 절망(絶望)을 말고 저-편 하늘을 바라다보아라. 검은 구름사이에 흰구름이 보이고 그 너머 저녁놀이 돌지를 않느냐? 오늘밤이 아니면 새는 아침부터는 아마도 이 비가 개이곤 말 것이다. 아, 자연(自然)은 이렇게도 언제든지 시일(時日)을 준다.

주석

청량 세계 제목 '청량 세계(淸涼世界)'는 본래 불교에서 번뇌가 사라진 맑고 서늘한 깨달음의 세계를 뜻한다. 여기서는 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뒤 맑아지는 세계, 곧 정신적 각성의 경지를 가리킨다.

전신(轉身) 몸을 돌려 바꿈, 곧 모습을 새로이 바꿈을 뜻한다. 자연이 여름이라는 계절로 변신했음을 가리킨다.

축제(缩製) 줄여서 작게 만듦, 곧 축소(縮小)·축약을 뜻한다. 인생의 폭을 스스로 좁히는 태도를 비판하는 말이다.

백금(白金)실 같은 광선 백금(플래티나)으로 뽑은 실처럼 희고 가늘며 날카롭게 내리쬐는 한낮의 강렬한 햇살을 비유한 표현이다.

경물(景物)에 분재(分在)된 의식 '경물'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주변 자연·사물, '분재'는 나뉘어 깃들어 있음을 뜻한다. 자아와 자연 만물에 흩어진 하나의 의식을 가리킨다.

심상·해설

꽃불처럼 웃는 여름 아침에서 백금실 같은 햇살이 쏟아지는 한낮을 지나, 주먹 같은 빗줄기를 퍼붓는 성난 저녁 소나기에 이르는 하루가 펼쳐진다. 자연의 격렬한 변화 속에서 각성과 조화를 촉구하며, 검은 구름 너머 저녁놀로 희망을 비추는 사색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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