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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
1930년대

항해

김기림 · 1930년대
팔월의 햇볕은 백금의 비눗방울 수평에 넘쳐 흐느끼는 황해의 등덜미에서 그것은 튀겨올리는 푸른 비늘조각. 젖빛 구름의 '스카트'가 음분(淫奔)한 바다의 허리를 둘렀다. 오만(傲慢)한 해양의 가슴을 가르는 뱃머리는 바다를 질투(嫉妬)하는 나의 칼날이다. 젖혀지는 물결의 흰 살덩이. 쏟아지는 흰 피의 분류(奔流). 내 눈초리보다도 높지 못한 먼 돛 그 돛보다도 더 높지 못한 수평선 검은 섬이 달려온다. 누른 섬이 달려간다. 함빡 바람을 들이켠 붉은 돛이 미끄러진다. 나의 가슴에 감겼다 풀리는 바람의 '테이프' 저기압은 벌써 북한산의 저편에- 열대의 심술쟁이 태풍은 적도에서 코고나보다. '마스트' 춤추는 빨간 깃발은 일직선. 우리들의 항해의 방향. 항구도 벌써 부풀어 오르는 조수(潮水)의 저편에 꺼져버렸다. 바람은 나사(羅紗)와 같이 빛나고 햇볕은 부스러 떨어지는 운모(雲母)가루. 키를 돌리지 말어라. 해도는 옹색한 휴가증명서. 뱃머리는 언제든지 서남의 중간에 들어라.

주석

음분(淫奔) 음란하게 함부로 날뛴다는 뜻의 한자어. 출렁이는 바다의 관능적 움직임을 비유한다.

분류(奔流) 내달리듯 거세게 흐르는 물줄기를 뜻하는 한자어(奔流).

나사(羅紗) 두껍고 보드라운 고급 모직물. 포르투갈어 raxa에서 온 말로, 빛나는 바람의 질감을 비유한다.

운모(雲母) 얇게 잘 갈라지며 반짝이는 광물. 부서져 흩날리는 햇빛을 운모 가루에 빗댔다.

해도 바다의 지형·항로를 그린 항해용 지도(海圖). 정해진 항로를 '옹색한 휴가 증명서'에 빗대어 자유로운 항해를 노래한다.

심상·해설

팔월의 눈부신 햇빛 아래 뱃머리가 바다의 가슴을 가르며 내달리고, 붉은 돛과 빨간 깃발이 일직선으로 항해의 방향을 가리키는 활기차고 호방한 바다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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