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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920년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 1920년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해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서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뿐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김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여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습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접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주석

빼앗긴 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식민지 조선의 국토를 상징한다. 들=땅=조국.

가르마 같은 논길 머리를 가른 가르마처럼 곧고 가지런하게 뻗은 논 사이 길을 비유한 표현이다.

삼단 같은 머리 삼(대마)을 한 단 묶은 것처럼 숱이 많고 윤기 나는 머리. 비에 씻겨 무성히 자란 보리를 빗댔다.

깝치지 마라 '깝치다'는 재촉하다·서두르게 하다의 방언. 나비·제비에게 서두르지 말라고 이른다.

들마꽃 들에 피는 들꽃을 이르는 말. 판본에 따라 '들마꽃/제비꽃'으로 읽기도 한다.

아주까리 기름 아주까리(피마자) 씨에서 짠 기름으로, 옛날 여인들이 머릿기름으로 발랐다. 들에서 일하던 아낙을 떠올리게 한다.

봄 신령이 접혔나 보다 무당에게 신이 내리듯 봄의 신령이 몸에 지폈다는 뜻. 봄기운에 도취된 황홀경을 나타낸다.

심상·해설

햇살 가득한 봄날,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푸른 들로 걸어 들어가면 비에 씻긴 보리밭과 어깨춤 추는 도랑이 생명으로 출렁인다. 그러나 그 들이 남의 땅임을 깨닫는 순간, 황홀한 봄빛 위로 빼앗긴 조국의 비애가 짙게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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