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1950년대
파초
항상 앓는 나의 숨결이 오늘은
해월(海月)처럼 게을러 은(銀)빛 물결에 뜨나니
파초(芭蕉) 너의 푸른 옷깃을 들어
이닷 타는 입술을 축여주렴
그 옛적 『사라센』의 마지막 날엔
기약(期約)없이 흩어진 두 낱 넋이었어라
젊은 여인(女人)들의 잡아 못 놓은 소매끝엔
고운 손금조차 아직 꿈을 짜는데
먼 성좌(星座)와 새로운 꽃들을 볼 때마다
잊었던 계절(季節)을 몇 번 눈 위에 그렸느뇨
차라리 천년(千年) 뒤 이 가을밤 나와 함께
빗소리는 얼마나 긴가 재어보자
그리고 새벽하늘 어디 무지개 서면
무지개 밟고 다시 끝없이 헤어지세
주석
해월(海月) 바다 위에 뜬 달. 여기서는 나른하게 물결에 떠 있는 상태를 비유한다.
사라센 중세 이슬람 제국·문명을 가리키는 옛 유럽식 호칭. 멸망한 옛 문명의 이미지로 쓰였다.
두 낱 넋 '낱'은 '개(個)'를 뜻하는 옛말. 두 개의 넋, 곧 두 영혼.
그렸느뇨 '그렸는가'의 옛 의문형 어미.
심상·해설
가을밤 은빛 물결에 떠 있는 듯 나른한 화자가 푸른 파초 잎으로 타는 입술을 축이며, 멸망한 옛 문명과 천 년의 시간, 새벽 무지개를 떠올리는 환상적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