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피리
보름이라 밤 하늘에
달은 높이 켠 등불 같아라
임아 홀로 가신 임아
이 몸은 어찌하라 홀로 두고
임만 혼자 훌훌히 가셨는고
아으 피 맺힌 내 마음
피리나 불어 이 밤 새우리
숨어서 밤에 우는 두견새처럼
나야 밤이 좋아 달밤이 좋아
이런 밤이야 꿈처럼 오는 이들
달을 품고 울던 '베를렌'
어둠을 안고 간 '예세닌'
찬 구들 베고 눈 감은 고월 상화…
낮은 게인 양 엎디어 살고
밤은 일어나 피리나 불고지고
어두운 밤의 장막 뒤에 달 벗삼아
임이 끼쳐주신 보배는 고이 간직하고
피리나 불어 설운 이 밤 새우리
다섯 손가락 사뿐 감아 쥐고
살포시 혀를 대어 한 가락 불면
은쟁반에 구슬 굴리는 소리
슬피 울어 예는 여울물 소리
왕대숲에 금바람 이는 소리…
아으 비로소 나는 깨달았노라
서투른 나의 피리소리일언정
그 소리 가락가락 온 누리에 퍼지어
메마른 임의 가슴속에도
붉은 핏방울 방울 돌면
찢기고 흩어진 마음 다시 엉기리
주석
베를렌(벨레이느) 폴 베를렌(Paul Verlaine, 1844~1896).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달과 우수의 정조를 노래한 시인으로 인용되었다.
예세닌(에세이닌) 세르게이 예세닌(Sergei Yesenin, 1895~1925). 러시아 시인으로,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고월(古月) 이장희(李章熙, 1900~1929)의 호. '봄은 고양이로다' 등을 남기고 요절한 시인.
상화(尙火) 이상화(李相和, 1901~1943)의 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쓴 저항 시인. 윤곤강은 요절한 두 선배 시인을 추모하고 있다.
왕대숲 왕대(굵고 키 큰 대나무)가 우거진 대숲.
불고지고 '불고 싶구나'의 옛 표현. '-고지고'는 소망을 나타내는 옛말 어미.
심상·해설
보름달이 등불처럼 걸린 밤, 떠난 임과 요절한 시인들을 그리며 피 맺힌 마음으로 피리를 부는 시인의 모습과, 그 가락이 은쟁반에 구슬 구르듯 온 누리에 퍼져 메마른 가슴을 적시는 장면이 애틋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