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지렁이의 노래
지렁이의 노래
알지 못하겠노라 검붉은 흙덩이 속에
나는 어찌하여 한 가닥 붉은 띠처럼
기인 허울을 쓰고 태어났는가
나면서부터 나의 신세는 청맹과니
눈도 코도 없는 어둠의 나그네여니
나는 나의 지나간 날을 모르노라
닥쳐올 앞날은 더욱 모르노라
다만 오늘만은 알고 믿을 뿐이노라
낮은 진구렁 개울 속에 선잠을 엮고
밤은 사람들이 버리는 더러운 쓰레기 속에
단 이슬을 빨아마시며 노래 부르노니
오직 소리 없이 고요한 밤만이
나의 즐거운 세월이노라
집도 절도 없는 나는야
남들이 좋다는 햇볕이 싫어
어둠의 나라 땅 밑에 번듯이 누워
흙물 달게 빨고 마시다가
비 오는 날이면 땅 위에 기어나와
갈 곳도 없는 길을 헤매노니
어느 거친 발길에 채이고 밟혀
몸이 으스러지고 두 도막에 잘려도
붉은 피 흘리며 흘리며 나는야
아프고 저린 가슴을 뒤틀며 사노라
주석
아지못게라 '알지 못하겠도다'의 옛 표기. '알 수 없구나'라는 영탄.
청맹과니 겉으로는 멀쩡하나 실제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눈, 또는 그런 사람. 여기서는 눈먼 지렁이의 처지를 가리킨다.
여니 '-이니'의 옛 표기. '~인 까닭에'의 뜻.
집도 절도 없다 몸 붙일 곳 하나 없이 가진 것 없고 의지할 데 없음을 이르는 관용 표현.
심상·해설
햇볕을 등진 채 땅 밑 어둠 속에서 흙물을 빨며 살아가는 눈먼 지렁이가, 밟혀 두 동강이 나도 붉은 피를 흘리며 끈질기게 견디는 모습에서 짓밟힌 존재의 처연한 생명력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