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 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가자.
사(四) 남매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잘못된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주석
객사(客死) 객지에서, 곧 고향이나 집을 떠난 타향에서 죽음.
파리 프랑스의 수도 파리(Paris). 나혜석이 그림 공부와 자유로운 삶을 누렸던 곳이자 인생이 무너진 계기가 된 곳.
공(空) 텅 빔, 아무것도 없음. 불교의 '공(空)' 개념을 빌려 허무한 자기 처지를 표현함.
과도기(過渡期)의 선각자(先覺者) 낡은 시대에서 새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남보다 먼저 깨달은 사람. 신여성으로서 시대를 앞서가다 희생된 자신을 가리킴.
인습(因襲) 예로부터 그대로 굳어져 내려온 낡은 관습.
심상·해설
자신을 살리고 또 무너뜨린 도시 파리로 죽으러 가겠다는 절규와, 남겨질 네 남매에게 어미가 아닌 시대를 원망하라며 묘에 꽃 한 송이를 부탁하는 비통한 유언의 장면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