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현해탄
달밤에 현해탄(玄海灘)을 건너며
갑판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몇 해 전 이 바다 어복(魚腹)에 생목숨을 던진
청춘(靑春) 남녀(男女)의 얼굴이 환등(幻燈)같이 떠오른다.
값비싼 오뇌(懊惱)에 백랍(白蠟)같이 창백(蒼白)한 인텔리의 얼굴
허영(虛榮)에 찌들어 여류(女流) 예술가(藝術家)의 풀어 헤친 머리털,
서로 얼싸안고 물 위에서 소용돌이를 한다.
바다 위에 바람이 일고 물결은 거칠어진다,
우국지사(憂國志士)의 한숨은 저 바람에 몇 번이나 스치고
그들의 불타는 가슴속에서 졸아붙는 눈물은
몇 번이나 비에 섞여 이 바다 위에 뿌렸던가
그 동안에 얼마나 수(數) 많은 물 건너 사람들은
「인생도처유청산(人生到處有靑山)」을 부르며 새 땅으로 건너왔던가.
갑판(甲板) 위에 섰자니 시름이 겨워
선실(船室)로 내려가니 「만열도항(漫熱渡航)」의 백의군(白衣群)이다.
발가락을 억지로 째어 다비를 꿰고
상투 자른 자리에 벙거지를 뒤집어쓴 꼴
먹다가 버린 벤또밥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강아지처럼 핥아 먹는 어린것들!
동포(同胞)의 꼴을 똑바로 볼 수 없어
다시금 갑판(甲板) 위로 뛰어 올라서
물속에 시선(視線)을 잠그고 맥(脈) 없이 섰자니
달빛에 명경(明鏡)같은 현해탄(玄海灘) 위에
조선(朝鮮)의 얼굴이 떠오른다!
너무나 또렷하게 조선(朝鮮)의 얼굴이 떠오른다.
눈 둘 곳 없어 마음 붙일 곳 없어
이슥하도록 하늘의 별 수(數)만 세노라.
1926.2.
주석
현해탄(玄海灘) 한국과 일본 규슈 사이의 바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일본으로 건너가던 뱃길.
어복(魚腹) 물고기의 뱃속. '어복에 장사 지낸다'는 곧 물에 빠져 죽음을 이르는 말.
백랍(白蠟) 정제한 흰 밀랍. 핏기 없이 창백한 낯빛을 비유함.
인생도처유청산(人生到處有靑山) 사람이 가는 곳마다 뼈를 묻을 청산이 있다는 뜻. 고향을 떠나 어디서든 죽어 묻힐 각오로 큰 뜻을 펼치라는 한시 구절.
만열도항(漫熱渡航) 통제 없이 마구 들끓듯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도항하던 당시 조선인 노동 이주의 실태를 가리키는 말.
다비(足袋) 일본식 버선. 엄지발가락이 따로 갈라진 형태.
벤또 도시락을 뜻하는 일본어.
심상·해설
달빛 비치는 현해탄을 건너며 바다에 몸을 던진 청춘들과 선실에 가득한 헐벗은 도항 동포의 참상을 보다, 거울 같은 물 위로 또렷이 떠오르는 조선의 얼굴 앞에 눈 둘 곳 없어 별만 세는 비통한 장면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