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찬 달밤에
달하 높이곰 돋으샤
어기야 멀리곰 비취오시라 ── 정읍사에서
찬 달 그림자 밟고
발길 가벼이 옛 성터 위에
나와 그림자 짝지어 서면
괼 이도 미울 이도 없는 몸이여!
누리는 저승보다도 다시 멀고
시름은 꿈처럼 덧없어라
어둠과 손잡은 세월은
주린 내 넋을 끌고 가노라
가냘픈 두 팔 잡아끌고 가노라
나야 슬픈 이 하늘 밑에 나서
행여 누가 볼세라 부끄러워라
마음의 거울 비취오면 한 일이 무엇이뇨
어찌 하리오 나에겐 겨레 위한
한 방울 뜨거운 피 지녔기에
그예 나는 조바심에 미치리로다
허망하게 빈 가슴 속에
끈 모르게 흐르는 뉘우침과 노여움
아으 더럽힌 이 몸 어느 데 묻히리이꼬
주석
정읍사(井邑詞) 현전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로 알려진 작품. 행상 나간 남편의 무사를 비는 아내의 노래로, '달하 노피곰 도다샤'로 시작한다. 윤곤강이 이 고전의 첫 구절을 빌려 와 시상을 열었다.
달하 '달이여'의 옛말. '-하'는 높임의 호격 조사.
노피곰 '높이높이'의 옛말. '-곰'은 강조의 접미사.
괼 이도 믤 이도 '사랑할 사람도 미워할 사람도'의 뜻. '괴다'는 사랑하다, '믜다'는 미워하다의 옛말.
무에뇨 '무엇이냐'의 옛 표기.
그예 마침내, 기어이.
묻히리이꼬 '묻히겠는가'의 옛 의문형 표현.
심상·해설
백제 가요 정읍사의 가락을 빌려, 차가운 달빛 아래 옛 성터에 그림자와 둘이 선 채 겨레를 향한 뜨거운 피를 안고 부끄러움과 노여움에 떠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독한 비탄이 절절히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