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풀밭에 누워서
가을날 풀밭에 누워서
우러러보는 조선의 하늘은
어쩌면 저다지도 맑고 푸르고 높을까요?
닦아 논 거울인들 저보다 더 깨끗하오리까.
바라면 바라볼수록
천리(千里) 만리(萬里) 생각이 아득하여
구름장을 타고 같이 떠도는 내 마음은,
애달픈 심란스럽기 비길 데 없소이다.
오늘도 만주(滿洲) 벌에서는 몇 천 명(千名)이나 우리 동포(同胞)가
놈들에게 쫓겨나 모진 악형(惡刑)까지 당하고
몇 십 명(十名)씩 묶여서 총(銃)을 맞고 꺼꾸러졌다는 소식(消息)!
거짓말이외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거짓말 같사외다.
고국(故國)의 하늘은 저다지도 맑고 푸르고 무심(無心)하거늘
같은 하늘 밑에서 그런 비극(悲劇)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소이다
안땅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은 상팔자지요.
철창 속에서라도 이 맑은 공기(空氣)를 호흡(呼吸)하고
이 명랑(明朗)한 햇발을 쬐어 볼 수나 있지 않습니까?
논두렁에 버티고 선 허수아비처럼
찢어진 옷 걸치고 남의 농사(農事)에 손톱 발톱 닳리다가
풍년(豊年) 든 벌판에서 총(銃)을 맞고 그 흙에 피를 흘리다니………
미쳐 날 듯이 심란한 마음 걷잡을 길 없어서
다시금 우러르니 높고 맑고 새파란 가을 하늘이외다
분(憤)한 생각 내뿜으면 저 하늘이 새빨갛게 물이 들 듯하외다
1930.9.18
주석
만주(滿洲) 중국 동북부 지역으로, 일제강점기 수많은 조선인이 이주해 살며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
안땅 '안쪽 땅'의 뜻으로 만주 등 국외와 대비되는 조선 본토(고국 안)를 가리킴.
허자비 '허수아비'의 옛말.
심상·해설
더없이 맑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풀밭에 누운 시인이, 만주 벌판에서 총 맞고 쓰러지는 동포를 떠올리며 분노로 하늘마저 새빨갛게 물들 듯한 격정을 느끼는 장면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