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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후
1940-1950년대

해후

이육사 · 1940-1950년대
모든 별들이 비취계단(翡翠階段)을 내리고 풍악소리 바로 조수처럼 부풀어 오르던 그 밤 우리는 바다의 전당(殿堂)을 떠났다 가을 꽃을 하직하는 나비 모양 떨어져선 다시 가까이 되돌아보곤 또 멀어지던 흰 날개 위엔 볕살도 따갑더라 머나먼 기억(記憶)은 끝없는 나그네의 시름 속에 자라나는 너를 간직하고 너도 나를 아껴 항상 단조한 물결에 익었다 그러나 물결은 흔들려 끝끝내 보이지 않고 나조차 계절풍(季節風)의 넋이 같이 휩쓸려 정처 못 일곱 바다에 밀렸거늘 너는 무슨 일로 사막(沙漠)의 공주(公主)같이 연지(脂) 찍은 붉은 입술을 내 근심에 표백(漂白)된 돛대에 거느뇨 오―안타까운 신월(新月) 때론 너를 불러 꿈마다 눈 덮인 내 섬 속 투명(透明)한 영락(玲珞)으로 세운 집안에 머리 푼 알몸을 황금(黃金) 항쇄(項鎖) 족쇄(足鎖)로 매여 두고 귓밤에 우는 구슬과 사슬 끊는 소리 들으며 나는 이름도 모를 꽃밭에 물을 뿌리며 머―ㄴ 다음 날을 빌었더니 꽃들이 피면 향기에 취(醉)한 나는 잠든 틈을 타 너는 온갖 화판(花瓣)을 따서 날개를 붙이고 그만 어디로 날아갔더냐 지금 놀이 내려 선창(船窓)이 고향(故鄕)의 하늘보다 둥글거늘 검은 망토를 두르기는 지나간 세기(世紀)의 상장(喪章)같이 슬프지 않은가 차라리 그 고운 손에 흰 수건을 날리렴 허무(虛無)의 분수령(分水嶺)에 앞날의 깃발을 걸고 너와 나와는 또 흐르자 부끄럽게 흐르자

주석

해후(邂逅)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우연히 다시 만남.

비취계단(翡翠階段) 비취옥으로 만든 계단. 별빛이 내리는 환상적 공간을 그린 표현.

전당(殿堂) 크고 화려한 집·궁전. 여기서는 '바다의 궁전'.

신월(新月) 초승달.

영락(玲珞)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식. '영락(瓔珞)'과 통하며 투명하고 영롱한 보배 구슬을 뜻한다.

항쇄(項鎖) 족쇄(足鎖) 죄인의 목에 씌우는 칼(항쇄)과 발에 채우는 차꼬(족쇄). 여기서는 임을 붙들어 두고 싶은 마음을 황금 사슬에 비유했다.

화판(花瓣) 꽃잎.

선창(船窓) 배의 창문.

상장(喪章) 상중임을 나타내려고 다는 검은 표지.

분수령(分水嶺) 물이 갈라져 흐르는 산마루. 어떤 일이 갈리는 결정적 고비를 뜻한다.

거느뇨 '거느냐(거는가)'의 옛 의문형 어미.

심상·해설

별빛이 비취 계단을 타고 내리고 풍악이 밀물처럼 차오르던 바다의 궁전, 흰 나비처럼 멀어지는 임과 노을 진 선창을 배경으로 재회와 이별이 교차하는 환상적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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