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1950년대
서풍
서릿빛을 함뿍 띠고
하늘 끝없이 푸른 데서 왔다.
강(江)바닥에 깔려 있다가
갈대꽃 하얀 위를 스쳐서.
장사(壯士)의 큰 칼집에 숨어서는
귀향가는 손의 돛대도 불어주고.
젊은 과부의 뺨도 희던 날
대밭에 벌레소릴 가꾸어놓고.
회한(悔恨)을 사시나무 잎처럼 흔드는
네 오면 불길(不吉)할 것 같아 좋아라.
주석
서풍(西風)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흔히 가을바람을 가리키며, 서늘하고 쓸쓸한 정조를 동반한다.
장사(壯士) 힘이 세고 기개가 굳센 사람. 큰 칼집은 그런 장사가 지닌 무기로, 서풍의 서슬 푸른 기운을 빗댄 것이다.
손 나그네, 길손. '귀향가는 손'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나그네를 뜻한다.
사시나무 잎자루가 길어 작은 바람에도 잎이 몹시 떨리는 나무. '사시나무 떨듯'이라는 말처럼 심한 떨림을 비유한다.
심상·해설
서릿빛을 띠고 푸른 하늘 끝에서 불어온 가을바람이 갈대꽃을 스치고 나그네의 돛을 밀며, 사시나무 잎처럼 회한을 떨게 하는 서늘하고 불길한 정취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