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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기
1930년대

노정기

이육사 · 1930년대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배 조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을이 구죽죽한 어촌(漁村)보다 어설프고 삶의 티끌만 오래 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매였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西海)를 밀항(密航)하는 「정크」와 같아 소금에 절고 조수(潮水)에 부풀어 올랐다. 항상 흐릿한 밤 암초(暗礁)를 벗어나면 태풍(颱風)과 싸워 가고 전설(傳說)에 읽어 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 하는 그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비쳐 주지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地平線)을 한숨에 기어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熱帶植物)처럼 발목을 옭아 쌌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냐 다 삭아 빠진 소라 깍지에 나는 붙어 왔다. 머― ㄴ 항구(港口)의 노정(路程)에 흘러간 생활(生活)을 들여다보며

주석

노정기(路程記) 여행의 경로와 일정을 적은 기록. 여기서는 시인이 걸어온 고난의 삶을 항해에 빗댄 인생 노정의 기록이다.

포범(布帆) 베로 만든 돛.

정크(junk) 중국 연해에서 쓰던 바닥이 평평한 나무 범선. 원문 표기는 「짱크」.

조수(潮水) 달의 인력으로 주기적으로 밀려들고 빠지는 바닷물. 밀물과 썰물.

산호도(珊瑚島) 산호초가 쌓여 이루어진 섬.

남십자성(南十字星) 남반구 하늘에서 보이는 십자 모양의 별자리. 남쪽 바다의 길잡이 별.

시궁치 시궁창의 바닥, 또는 더러운 물이 고인 시궁창.

심상·해설

깨어진 배 조각 같은 목숨이 밤마다 태풍과 암초의 바다를 떠돌다, 별빛도 없는 항로 끝 삭은 소라 껍데기에 붙어 흘러온 신산한 삶의 항해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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