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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복
1940-1950년대

편복

이육사 · 1940-1950년대
광명(光明)을 배반(背反)한 아득한 동굴(洞窟)에서 다 썩은 들보라 무너진 성채(城砦) 위 너 홀로 돌아다니는 가엾은 박쥐여! 어둠에 왕자(王者)여! 쥐는 너를 버리고 부잣집 곳간으로 도망했고 대붕(大鵬)도 북해(北海)로 날아간 지 이미 오래거늘 검은 세기(世紀)에 상장(喪裝)이 갈갈이 찢어질 긴 동안 비둘기같은 사랑을 한 번도 속삭여 보지도 못한 가엾은 박쥐여! 고독(孤獨)한 유령(幽靈)이여! 앵무와 함께 종알대어 보지도 못하고 딱따구리처럼 고목(古木)을 쪼아 울리지도 못하거니 만호보다 노란 눈깔은 유전(遺傳)을 원망한들 무엇하랴 서러운 주교(呪交)일사 못 외울 고민(苦悶)의 이빨을 갈며 종족(種族)과 홰를 잃어도 갈 곳조차 없는 가엾은 박쥐여! 영원(永遠)한 「보헤미안」의 넋이여! 제 정열(情熱)에 못 이겨 타서 죽는 불사조(不死鳥)는 아닐망정 공산(空山) 잠긴 달에 울어 새는 두견(杜鵑)새 흘리는 피는 그래도 사람의 심금(心琴)을 흔들어 눈물을 짜내지 않는가! 날카로운 발톱이 암사슴의 연한 간(肝)을 노려도 봤을 너의 머―ㄴ 조선(祖先)의 영화(榮華)롭던 한 시절 역사(歷史)도 이제는 「아이누」의 가계(家系)와도 같이 서러워라! 가엾은 박쥐여! 멸망(滅亡)하는 겨레여! 운명(運命)의 제단(祭壇)에 가늘게 타는 향(香)불마저 꺼졌거든 그 많은 새짐승에 빌붙일 애교(愛嬌)라도 가졌단 말인가? 상금조(相琴鳥)처럼 고운 뺨을 채롱에 팔지도 못하는 너는 한 토막 꿈조차 못 꾸고 다시 동굴(洞窟)로 돌아가거니 가엾은 박쥐여! 검은 화석(化石)의 요정(妖精)이여!

주석

편복(蝙蝠) 박쥐를 뜻하는 한자어. 빛을 등지고 동굴에 사는 박쥐에 망해 가는 겨레를 빗댄 작품이다.

대붕(大鵬) 장자(莊子)에 나오는 상상의 큰 새. 한 번에 구만 리를 난다는 웅대한 새로, 박쥐의 처지와 대비된다.

북해(北海) 북쪽 바다. 대붕이 날아가 깃든다는 곳.

상장(喪裝) 상복. 검은 시대(일제강점기)를 초상에 빗댄 표현.

만호(萬戶) 매우 많은 집. '만호보다 노란 눈깔'은 어떤 등불보다도 노랗게 빛나는 박쥐의 눈을 가리킨다.

주교(呪交) 주문(呪文)·주술의 글. 서러운 주문조차 외울 수 없는 처지를 말한다.

보헤미안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 집시(Gypsy)를 가리키던 말.

불사조(不死鳥) 제 몸을 불살라 죽고 그 재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전설의 새 피닉스.

두견(杜鵑)새 피를 토하며 운다는 새. 망국(亡國)의 한과 슬픔을 상징한다.

조선(祖先) 조상. 나라 이름 조선이 아니라 '먼 선조'를 뜻한다.

아이누 일본 홋카이도 등지의 선주민. 세력을 잃고 쇠퇴한 민족의 예로 들었다.

상금조(相琴鳥) 고운 깃과 자태로 새장에 길러지던 관상용 새. 그조차 못 되는 박쥐의 처지를 부각한다.

채롱 가는 대오리로 결어 만든 새장.

심상·해설

빛을 등진 캄캄한 동굴에서 무너진 성채 위를 홀로 떠도는 눈먼 박쥐의 모습에, 향불마저 꺼진 채 멸망해 가는 겨레의 비통함이 겹쳐지는 어두운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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