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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산중
1940-1950년대

하일산중

노천명 · 1940-1950년대
보리이삭들이 바람에 물결칠 때마다 어느 밭고랑에서 종다리가 포르릉 하늘로 오를 것 같다 논도랑을 건너고 밭머리를 휘돌아 동구릉(東九陵) 가는 길을 물으며 물으며 차츰 산속으로 드는 낮은 그림 속의 선인(仙人)처럼 내가 맑고 한가하다 낮이 기운 산중에서 꿩 소리를 듣는다 당홍댕기를 칠칠 끄는 처녀 같은 맵시의 꿩을 찾다 보면 철쭉꽃이 불그레하게 피어 있다 초록물이 뚝뚝 듣는 나무들이 그늘진 곳에 활나물 대나물 맺힐 때를 보며 ―나는 뱀이 무서워 칡 순을 따 머리에 꽂던 일이며 파란 가랑잎에 무릇을 받아먹던 일이며 도토리에 콩가루를 발라먹던 산골 얘기를 생각해 낸다 어디서 꿩알을 얻을 것 같은 산속 ‘숙(淑)’은 산나물 꺾는 게 좋고 난 ‘송충(松蟲)’이가 무섭고― 한 치도 못 되는 벌레에게 다닥뜨릴 때마다 이처럼 질겁을 해 번번이 못난이짓을 함은 진정 병신스럽도다 솔밭을 헤어나 첫째 능에 절하고 들어 잔디 위에 다리를 쉰다 천년 묵은 여우라도 나올 성부른 태고적 조용한 낮 내가 잠깐 현기를 느낀다

주석

하일산중(夏日山中) 여름날 산속. 제목 그대로 한여름 산행의 정경을 담은 시다.

동구릉(東九陵) 경기도 구리에 있는 조선 왕릉군. 태조 건원릉을 비롯해 아홉 능이 모여 있어 붙은 이름이다.

선인(仙人) 신선. 속세를 벗어나 산수 사이에 노니는 맑고 한가로운 존재.

당홍댕기 다홍빛(짙은 붉은색) 댕기. 처녀가 머리 끝에 드리우던 붉은 댕기로, 꿩의 화려한 깃을 빗댔다.

무릇 들에 나는 백합과의 풀. 비늘줄기를 고아 먹거나 군것질거리로 삼았다.

송충(松蟲)이 솔잎을 갉아먹는 송충이(솔나방 애벌레). 화자가 무서워하는 벌레로 등장한다.

심상·해설

보리밭 물결과 꿩 소리, 붉은 철쭉이 어우러진 한여름 동구릉 가는 산길. 산나물 캐고 칡 순 꽂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태곳적처럼 고요한 능에서 아득한 현기를 느끼는 정경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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