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고대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날마다 날마다 당신을 기다리게 합니다
해가 저물어 산 그림자가 촌집을 덮을 때에 나는 기약(期約) 없는 기대(期待)를 가지고 마을 숲 밖에 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를 몰고 오는 아이들의 풀잎 피리는 제 소리에 목 막힙니다
먼 나무로 돌아가는 새들은 저녁 연기에 헤엄칩니다
숲들은 바람과의 유희(遊戱)를 그치고 잠잠히 섰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동정(同情)하는 표상(表象)입니다
시내를 따라 굽이친 모랫길이 어둠의 품에 안겨서 잠들 때에 나는 고요하고 아득한 하늘에 긴 한숨의 사라진 자취를 남기고 게으른 걸음으로 돌아옵니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날마다 날마다 당신을 기다리게 합니다
어둠의 입이 황혼(黃昏)의 엷은 빛을 삼킬 때에 나는 시름없이 문밖에 서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다시 오는 별들은 고운 눈으로 반가운 표정(表情)을 빛내면서 머리를 조아 다투어 인사합니다
풀 사이의 벌레들은 이상한 노래로 백주(白晝)의 모든 생명(生命)의 전쟁(戰爭)을 쉬게 하는 평화(平和)의 밤을 공양(供養)합니다
네모진 적은 못의 연(蓮)잎 위에 발자취 소리를 내는 시럽은 바람이 나를 조롱(嘲弄)할 때에 나는 아득한 생각이 날카로운 원망(怨望)으로 화(化)합니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날마다 날마다 당신을 기다리게 합니다
일정(一定)한 보조(步調)로 걸어가는 사정(私情) 없는 시간(時間)이 모든 희망(希望)을 채찍질하여 밤과 한께 몰아갈 때에 나는 쓸쓸한 잠자리에 누워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가슴 가운데의 저기압(低氣壓)은 인생(人生)의 해안(海岸)에 폭풍우(暴風雨)를 지어서 삼천세계(三千世界)는 유실(流失)되었습니다
벗을 잃고 견디지 못하는 가엾은 잔나비는 정(情)의 삼림(森林)에서 저의 숨에 질식(窒息)되었습니다
우주(宇宙)와 인생(人生)의 근본 문제(根本問題)를 해결(解決)하는 대철학(大哲學)은 눈물의 삼매(三昧)에 입정(入定)되었습니다
나의 「기다림」은 나를 찾다가 못 찾고 저의 자신(自身)까지 잃어버렸습니다
주석
백주(白晝) 환히 밝은 대낮.
삼천세계(三千世界) 불교에서 말하는 온 우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준말.
잔나비 원숭이의 옛말.
삼매(三昧)·입정(入定) 삼매는 잡념을 떠나 한 가지에 마음을 모은 경지, 입정은 그 선정(禪定)에 드는 것. 불교 용어.
심상·해설
해 질 녘 숲 밖에서, 다시 어둠 속 문밖에서, 끝내 쓸쓸한 잠자리에서—날마다 기약 없이 님을 기다리다 기다림 자체마저 길을 잃는 사무친 그리움이 황혼과 밤의 정경 속에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