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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가는 시악시의 말
1920년대

시집가는 시악시의 말

박용철 · 1920년대
나는 이제 가네. 눈물 한줄도 아니흘리고 떠나가려네. 어머니 치마로 눈을 가리지 마서요. 너희들도 다 잘있거라. 새벽빛이 아직도 희미해서 얼굴들이 눈에 서투르오, 다시한번 눈이라도 익혀둡시다. 공연히 수선거리지들 마러요. 남의 마음이 흔들리기 쉬운줄도 모르고. 황토 붉은산아 푸른 잔디밭아 다 잘있거라. 잔자갈 시냇물도 잘 놀아 지나거라. ―가면 아주가나, 잔사정 작별을 내 이리하게! 봉선화야 너는 거년까지 내손가락에 물들였지? 순이야, 금이야, 남이야, 빛나든 철의 동무들아, 이제는 동무라는 말조차 써볼데가 없겠고나, 너희들 따―내린 머리를 어디좀 만져보자. 붉은단기 울넘으로 번득이는 자랑스러움, 거리낄데 하나없이 굴러가든 너의들 웃음, 이것이 어느새 남의일같이 이야기 될줄이야! 손하나 타지않고 산골에 맑은 흰나리꽃송이같이, 매인데 굽힐데 없이 자라나든 큰아기시절을 내 이제 뒤으로 머리돌려 아까워 할줄이야! 눈물은 내서 무엇하니, 가고야 마는것을! 가면 아주 가랴만은. 남는 너희나 그대로 있어지다고, 내다시 볼때까지. 아버지 이길은 무슨길이길래, 눈물에 싸여서라도 가고 보내는 마련이래요? 마른잎은 부는바람에 불려야만 되나요? 손에 닳고 눈에 익은 모든것을 버리고 아득한 바다에 몸을 띄워야만 새살림길인가요? 갈피없는 걱정 쓸데없는 앙탈을 이냥삼키고, 나는 떠나가네. 싸늘한 두손으로 얼굴을 싸만지며.

주석

시악시 '색시'의 방언·옛말. 시집가는 새색시(신부)를 가리킴.

거년 (去年) 지난해. 작년.

붉은단기 (붉은 댕기) 처녀가 땋은 머리 끝에 드리던 붉은 끈. 시집가기 전 처녀 시절의 상징.

흰나리꽃 흰 백합. 산골에 손 타지 않고 깨끗이 핀 백합으로, 순결한 처녀 시절을 비유함.

이냥 '이대로', '이러한 채로'의 옛말.

심상·해설

새벽빛 희미한 가운데 정든 산과 시냇물, 봉선화와 댕기 머리 동무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눈물을 삼키고 새 살림길로 떠나는 새색시의 애틋한 장면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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