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디킨슨
낙원이 먼 데가 아니라
벽 하나 사이 이웃 방이라네,
거기 한 벗이 와 앉아
운명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면.
사람 마음이란 이리 굳센 것일까?
이런 것을 차마 견딜 수 있다니
걸어오는 발 떼는 소리,
가만히 열리는 문소리를.
가을
에밀리 • 디킨슨
아침 기운 전보다 부드럽고,
밤알도 겉이 붉어지고,
딸기는 뺨이 더 포동포동해지고,
장미꽃은 자취 사라졌다.
단풍은 빛난 치마 입고,
온 들이 붉은 옷을 둘러 있다
철 늦은 사람 될까 무서우니
나는 새 저고리 내어 입으리라.
주석
디킨슨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짧고 응축된 시로 유명하다. 박용철이 그의 시 두 편('낙원'과 '가을')을 옮겼다.
낙원이 이웃 방이라네 천국·행복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벽 하나 너머 가까이 있다는 디킨슨 특유의 역설. 사랑하는 벗이 운명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 방이 곧 낙원이라는 뜻.
철 늦은 사람 계절에 뒤떨어진 사람. 온 들이 가을빛으로 갈아입었으니 자기도 새 옷(새 저고리)으로 철에 맞추겠다는 익살.
심상·해설
벽 하나 너머의 방을 낙원이라 부르며 발소리와 문소리에 가슴 졸이는 기다림과, 밤알과 딸기가 붉어지고 온 들이 단풍 치마로 갈아입는 가을 아침의 화사함이 나란히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