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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
1920년대

남방

김명순 · 1920년대
북방의 처녀가 남방을 생각하면 울렁줄렁 달린 밀감 밭을 허울 벗은 몸으로 지나더라도 명주옷을 입고 임을 만나러 가는 듯이 가슴이 두근두근거려서 첫 일월에 우렛소리가 휘어진 가지를 흔들고 황금의 열매를 딴다지요. 북방의 처녀가 남방을 생각하면 빨간 동백의 빈 동산을 철을 모르는 몸으로 지나더라도 임이 오시다 마신 듯이 심란한 한숨이 쉬어져서 초사월의 비가 푸르른 잎을 굴리고 빨간 꽃을 떨어뜨린다지요. 북방의 처녀가 남방을 생각하면 초가집 처마 아래 우산 걷어들고 우두커니 서서 눈물 지우더라도 조약돌 틈에 속삭이는 샘물같이 유랑하는 노래가 저절로 들려서 초저녁에 불 비친 미닫이가 열리고 책상 앞의 석상이 움직인다지요.

주석

남방(南方) 남쪽 지방. 따뜻하여 밀감과 동백이 자라는 남국을 가리킨다.

밀감(蜜柑) 귤. 따뜻한 남쪽에서 나는 과일.

첫 일월 음력 정월의 첫머리, 한 해의 시작 무렵.

석상(石像) 돌로 만든 형상, 돌부처나 돌조각상.

심상·해설

추운 북방의 처녀가 그리는 따뜻한 남쪽—밀감이 익고 동백이 지는 동산을 거니는 환상이, 초저녁 불 밝힌 방에서 임을 향한 설렘으로 아련히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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