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주영의 고백
―「여등의 배후로부터(汝等の背後より)」(나카니시 이노스케)에서
슬픈 빛을 담은 파래진 주름살을 후두두 떨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는 나더러,
“법률(法律)을 해라, 너는 법률(法律)을 해라, 그래서 설치를 하여라!”
조그마한 딸은 그 말씀을 거스르고요,
기어이 연애(戀愛)를 하였어요.
S중위(中尉)를요―신춘용(申春容)을요―
그러다가 나라를 사랑했지요, ×××를 지니고서,
―꿈에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으세요,
마지막 날 토마스 신부(神父)와도 같이,
눈물만 글썽글썽 하시어서!
―옳다, 사랑이 너의 전부(全部)다,
목숨밖에 가진 것 없는 너희네는
살겠거든 사랑하여라, 힘껏!
주석
여등의 배후로부터(汝等の背後より) 일본 작가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의 소설. 식민지 조선을 동정적으로 다룬 작품으로, 김동환이 그 인물 '주영'의 고백 형식을 빌렸다.
주영 원작 속 인물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사랑과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조선 여성.
설치(雪恥) 부끄러움이나 원통함을 씻음. 여기서는 억울하고 한 맺힌 일을 풀어 냄을 뜻한다.
토마스 신부(神父) 임종을 지키며 말없이 눈물 흘리는 성직자의 모습에 아버지를 빗댄 비유.
××× 일제의 검열로 지워진 부분. '폭탄', '권총', '태극기' 등 독립운동과 관련된 어휘가 들어갈 자리로 추정된다.
심상·해설
법률을 공부해 원한을 풀라던 아버지의 유언을 거스르고 사랑과 조국에 몸을 던진 딸이, 꿈속에서 말없이 눈물만 글썽이는 아버지 앞에서 '사랑이 전부'라 되뇌는 비장한 고백의 정경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