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울 수도 없거든
―해파리의 노래(김안서)에서―
색시. 노―란 금(金)잔디 깔릴 때 오신다더니만,
흰 눈이 치맛자락을 덮어도 기별(寄別) 없구요,
돌씨 지나게 무슨 일을 하세요.
그립다 그립다 못해서 이제는
눈물조차 마르고요,
울음도 없는 쓰린 날은 더 더 괴롭답니다,
가슴속엔 회오리바람.
청년(靑年). 그러길래 죽고 싶다지요.
기별(寄別)도 할 수 없구요, 돌아가지도 못하길래
꿈에나 만날까고, 밤을 그리워하니
밤이 와도 잠은 안 오고,
그리운 옛날은 볼 수도 없답니다.
빨간 진달래꽃이 가슴을 덮을 때!
고요히 고요히 눈 감고 옛날의 노래 부르렵니다.
에익, 못난 것들이여, 그래도 웃어라.
웃을 수 없는 것을 웃어라!
아무래도 웃을 수 없다고?
그러거든 울어라, 힘껏 울어라!
울 수도 없거든 죽어라!
님을 위하여 목숨을 끊어라.
사랑하는 이라면 어려울까, 그것이
나라를 위하거나, 세상(世上)을 위하거나 그리운 님을 위하거나 그게 어려울 일일까?
사랑으로 죽는 무덤가에는 꽃이 핀다더라,
아, 청춘(靑春)아,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가슴을
안아줄 오직 죽음을 찾아라!
주석
해파리의 노래 안서 김억이 1923년에 펴낸 한국 최초의 창작 시집. 김동환이 이 시집의 정서를 빌려 색시와 청년의 대화로 재구성했다.
김안서(金岸曙) 시인·번역가 김억(1896~?). '안서'는 그의 호.
기별(寄別) 소식을 전함, 또는 전하는 소식. 흔히 '기별(奇別)'로 쓴다.
돌씨 지나게 한 해가 다 지나도록. '돌'은 한 해, '돌씨'는 한 해가 도는 것을 이른 말로 풀이된다.
회오리바람 한곳을 빙빙 돌며 거세게 부는 바람.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혼란을 비유한다.
심상·해설
금잔디 필 때 온다던 임이 눈이 쌓이도록 소식 없어 눈물마저 마른 색시와, 차라리 임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끊으라 절규하는 청년의 목소리가 겹치는, 비장한 사랑과 기다림의 정경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