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첫사랑
네모진 책상
흰 벽 위에 삐뚜러진 세잔느 한 폭.
낡은 페-지를 뒤적이는 흰 손가락에 부딪혀 갑자기 숨을 쉬는 시들은 해당화.
증발한 향기의 호수
(바닷가에서)
붉은 웃음은 두 사람의 장난을 바라보았다.
흰 희망의 흰 화석 흰 동경의 흰 해골 흰 고대의 흰 미이라
쓴 바닷바람에 빨리우는 신상의 등대를 비웃던 두 눈과 두 눈은
둥근 바다를 미끌려저 가는 기선들의 출항을 전송했다.
오늘
어두운 나의 마음의 바다에
흰 등대를 남기고 간
-불을 켠 손아
-불을 끈 입김아
갑자기 창살을 흔드는 벌떼의 기적.
배를 태워 바다로 흘려보낸 꿈이 또 돌아오나 보다.
나는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지.
속삭임이 발려 있는 시계딱지
다변에 지치인 만년필
때묻은 지도들을
나는 나의 기억의 흰 테이블크로스 위에 펴 놓는다
흥
인제는 도망해야지
란아-
내가 돌아올 때까지
방을 좀 치워 놓아라.
주석
세잔느 프랑스의 화가 폴 세잔(Paul Cézanne).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며, 벽에 걸린 그림으로 모던한 분위기를 환기한다.
미이라 미라(mummy). 방부 처리되어 보존된 시신으로, '흰 고대'의 죽은 이미지를 강조한다.
시계딱지 회중시계의 뚜껑(딱지). 옛 회중시계는 여닫는 금속 뚜껑이 달려 있었다.
심상·해설
흰빛으로 가득한 방과 바닷가 기억이 겹쳐지며, 시든 해당화와 등대처럼 어른거리는 첫사랑의 잔상이 차갑고도 그리운 모더니즘 풍경으로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