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어떤 친한 시의 벗에게
드디어 이 책은 완성된 질서를 갖추지 못하였다. 방황 돌진 충돌 그러한 것들로만 찬 어쩌면 이렇게도 야만한 토인의 지대이냐?
그러면서도 내가 권하고 싶은 것은 의연히 상봉이나 귀의나 원만이나 사사나 타협의 미덕이 아니다. 차라리 결별―을 저 동양적 적멸로부터 무절제한 감상의 배설로부터 너는 이 즉각으로 떠나지 않아서는 아니 된다.
탄식. 그것은 신사와 숙녀들의 연후의 예의가 아니고 무엇이냐? 비밀. 어쩌면 그렇게도 분 바른 할머니인 십구세기적 「비―너쓰」냐? 너는 그것들에게서 지금도 곰팡이의 냄새를 맡지 못하느냐?
그 비만하고 노둔한 연후의 예의 대신에 놀라운 오전의 생리에 대하여 경탄한 일은 없느냐? 그 건장한 아침의 체격을 부러워해 본 일은 없느냐?
까닭 모르는 울음소리 과거에의 구원할 수 없는 애착과 정경. 그것들 음침한 밤의 미혹과 현운에 너는 아직도 피로하지 않았느냐?
그러면 너는 나와 함께 어족과 같이 신선하고 깃발과 같이 활발하고 표범과 같이 대담하고 바다와 같이 명랑하고 선인장과 같이 건강한 태양의 의풍을 배우자.
나도 이 책에서 완전히 버리지 못하였다만은 너는 저 운문이라고 하는 예복을 너무나 낡았다고 생각해 본 일은 없느냐? 아무래도 그것은 벌써 우리들의 의상이 아닌 것 같다.
나는 물론 네가 이 책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영구히 너의 사랑을 받기를 두려워한다. 혹은 네가 이 책만 두고두고 사랑하는 사이에 너의 정신이 한곳에 멈춰 설까 보아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네가 알다시피 이 책은 소화 오년 가을로부터 소화 구년 가을까지의 동안 나의 총망한 숙박부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내일은 이 주막에서 나를 찾지 말아라. 나는 벌써 거기를 떠나고 없을 것이다.
어디로 가느냐고? 그것은 내 발길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어디로든지 가고 있을 것만은 사실일 게다.
소화 구년 일〇, 일오 저자
주석
적멸(寂滅) 불교에서 모든 번뇌가 사라진 고요한 경지. 여기서는 정체되고 소극적인 동양적 태도를 비판적으로 가리킨다.
사사(師事) 스승으로 받들어 섬기며 가르침을 받음.
노둔(魯鈍) 둔하고 어리석음. 굼뜨고 미련함.
현운(眩暈) 어지러움, 현기증.
의풍(儀風) 위엄 있는 풍모. '위풍(威風)'과 통하는 말.
소화(昭和) 일본 연호. 소화 5년은 1930년, 소화 9년은 1934년.
총망(悤忙) 매우 바쁘고 급함.
숙박부(宿泊簿) 여관에 묵은 손님의 명단을 적은 장부. 여기서는 시집을 잠시 머문 기록에 빗댄 것.
심상·해설
낡은 십구세기적 감상과 동양적 적멸을 곰팡이 냄새로 떨쳐 내고, 물고기와 표범과 태양처럼 싱싱한 아침의 정신으로 끝없이 떠나가려는 모더니스트의 선언적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