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1910년대
일년
나는 아끼지 않으련다.
낙엽이 저 눈발이 덮인
시골 능금나무의 청용(靑容)과 장년(壯年)을……
언제나 너는 가고 오지 않는 것.
오늘도 들창에는 흰 구름이 지나가고,
참새들이 꾀꼬리처럼 지저귄다.
모란꽃이 붉던 작년 오월,
지금은 기억(記憶)마저 구금 되었는가?
나의 일년이여, 짧고 긴 세월이여!
노도(怒濤)에도, 달콤한 봄바람에도,
한결같이 묵묵하던 네 표정을 나는 안다,
허나 그렇게도 일년은 정말 평화로웠는가?
‘피녀(彼女)’는 단지 희망하는 마음까지
범죄 그 사나운 눈알로 흘겨본다.
나의 삶이여! 너는 한바탕의 꿈이려느냐?
한간 방은 오늘도 납처럼 무겁다.
재빠른 가을바람은 멀지 않아,
버들잎을 한 움큼 저 창(窓) 틈으로,
지난해처럼 훑어 넣고 달아나겠지,
마치 올해도 세계는 이렇다는 듯이.
그러나 한개 여윈 청년은 아직 살았고,
또다시 우리 집 능금이 익어 가을이 되리라.
눈 속을 스미는 가는 샘이 대해에 나가 노도를 이룰 때,
일년이여, 너는 그들을 위하여 군호를 불러라.
나는 아끼지 않으련다, 잊어진 시절을.
일년 평온무사한 바위 아래 생명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넓고 큰 대양의 앞날을 향하여,
지금 적막한 여로를 지키는 너에게 나는 정성껏 인사한다.
주석
청용(靑容) 푸른 모습. 여기서는 잎이 무성하던 능금나무의 싱싱한 자태를 뜻한다.
피녀(彼女) '그 여자'를 뜻하는 한자말(일본어 '카노조'의 번역투). 시에서는 자유를 억누르는 시대·권력을 사람처럼 빗댄 것으로 읽힌다.
군호(軍號) 군대에서 서로를 확인하려고 미리 정해 둔 신호나 암호.
심상·해설
흘러가 돌아오지 않는 한 해를 돌아보며, 납처럼 무거운 한 칸 방과 갇힌 희망을 견딘다. 그럼에도 여윈 청년은 살아 있고, 눈 속 가는 샘이 언젠가 큰 바다의 노도를 이루리라는 의지로 작별의 한 해에 인사를 건넨다.
낭독 지시
Style: 한 해를 돌아보듯 차분히 운을 떼되, 4행씩 한 연으로 묶어 읽고, 마지막 연 '정성껏 인사한다'는 따뜻하고 단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