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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리라 네 탐내는 모든 것을
1900-1910년대

주리라 네 탐내는 모든 것을

임화 · 1900-1910년대
젊었을 그 때엔 저렇듯 아름다운 꽃 이파리도, 이곳엔 꿈인 듯 흩어져 버리고, 천년의 긴 목숨을 하늘 높이 자랑하든 저 아름드리 솔 잣나무의 높고 큰 줄기도 역시 이곳에는 허리를 꺾고 넘어지나니, 이 모든 것의 위에를 마음대로 오르고 내리는 온갖 새의 임금인 독수리여! 너도 역시 마지막엔 그 크고 넓은 두 날갯죽지를 흐늘어뜨리고, 저무는 가을 날 초라한 나뭇잎새 바람에 나부껴 흩날리듯 옛 그날이 있는 듯 만 듯 덧없이 한줌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가? 노한 구름이 비바람 뿌리며 소리치던 그 험한 날 천리 먼 길에도, 일찍이 날개를 접어 굴욕의 숲속에서 부끄러운 눈알을 한번도 두려움에 굴려본 기억이 없는 오오! 하늘의 영웅이여! 너도 주검이 한번 네 큰 몸을 번쩍 들어 땅 위에 메다치면 비록 어지러운 가슴을 누를 수 없는 노함과 원한에 깨칠지언정, 날개를 펼쳐 다시 한 번 이곳에서 하늘을 향하여 화살처럼 내닫지는 못했는가? 오오! 말 없는 악령이여! 모든 것의 무덤인 대지여! 너는 말하지 못하겠는가? 정말로 너는 목숨 있는 모든 것을 주검으로 거두는, 살아있고 살아가는 모든 것의 최후의 원수인지…… 너는 대답지 못하겠는가? 천고의 옛날과 같이 지금도 또 끝없을 먼 미래에까지 너는 역시 말 없는 짐승이 되어 이곳에 엎뎌져 있겠는가? 높은 산악이여! 굳은 암석이여! 끝없는 바다까지도 네 품에 안고 있는 무한한 담묵과 암흑의 군주여! 만일 네 넓고 푸른 대양이나 호수의 눈과 같이 언제나 뜨고서도 보지를 못한다면, 이 한 몸 둥그런 돌멩이 만들어 영원히 감지 않는 네 속에 풍덩 뛰어 들리라. 만일 네 누르고 푸른 가죽이나 검고 굳은 바위처럼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다면은, 사랑하는 어머님 젖가슴 뜯으며 어리광 부리던, 이 두 손으로 네 위에 더운 피 흐르도록 두드리리라. 만일 네 아늑한 산맥의 귓전이 하늘을 찢는 우뢰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면, 못 잊을 임 볼 밑에서 뜨거운 마음을 하소연 하던, 이 다문 입을 열어 입술이 불되도록 절규하리라. 만일 네 깊은 심장이 어둠과 침묵 밖에는 아무것도 알기를 싫어한다면, 두 손과 다리를 가슴에 한데 모아 운석이 되어 네 위에 떨어지리라. 그래도 만일 네 영원히 침묵의 제왕으로 주검밖에 아무것도 알지를 못한다면, 주리라! 오오, 네 탐내는 모든 것을…… 너의 멀고 넓은 태평양 바다의 한옆 아늑한 내해 가운데 한 오리 내어민 반도 동쪽 가, 성천강 물줄기 맑게 흐르는 남쪽 기슭인 네 한길 품속에 영원히 잠든 내 사랑하는 벗 그가 네게 내어준 그것과 같이 심장 두 팔 두 다리, 도 그 위를 뛰고 달리며 일찍이 어떠한 두려움에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던 청년의 이 온몸을…… 너는 탐내는가? 말해보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으로도 아직 네 탐욕의 목마름은 나을 수가 없겠는가? 오오! 주리라! 그러면 살아있는 이 위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미워하며 울고 웃는 모든 것과, 흐르는 세월의 물결 이외의 아무런 권위 앞에서도 일찍이 머리를 숙여보지 않았던, 부라는 정열과 살아있는 생각의 모두를…… 암흑의 심장이여! 주검의 악령이여! 네 이 가운데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를 탐낸다면, 소리 높여 대답하라. 그러나 만일, 오오! 그래도 만일, 네 악마의 검은 배가 그것으로도 아직 찰 수가 없다면, 주리라! 그의 벗 되는 이 몸과 나머지 모든 것을…… 그리고― 그가 안고 울고 웃고 즐기고 노하며 마지막 그의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오히려 무서운 매발톱이 어린 목숨을 탐내어 하늘을 감돌 제, 철모르는 어린것을 두 깃으로 얼싸안는 어미새의 가슴처럼, 그것을 그것을 지키려고 온 몸을 흥분에 떨던, 그의 평생의 요람이었고 그의 모든 벗의 성곽이었던 청년의 정열과 진리의 무대까지도…… 그러나 또 만일, 또, 또 만일, 탐욕의 열병에 썩어가는 네 오장이 그것으로도 아직 찰 수가 없다면, 그의 자라나던 성곽과 노래의 대오 살림의 진실과 진리의 길을 꽃 위에 수놓던 군대의 모두가, 열 몇 해 오랫동안 그 배 위에서, 산 같은 풍랑의 두려움에도 신기루의 달큼한 유혹에도, 오직 검은 하늘 저쪽 밝은 별 이끄는 만리 뱃길에 키 자루를 어지럽히지 않았던, 이 검은 쇠로 굳게 무장한 전함 돛대 끝 높이 빛나는 우리들 ‘××××’의 깃발까지도, 네 그칠 바 모르는 오장의 밑바닥을 메우려고 검은 두 손을 벌린다면, 벌레의 구물대는 그 위에 내놓기를 아끼지 않으리라! 그러나 네 높고 큰 산악의 귓전을 기울여보라! 네 잠잠히 넓은 대양과 호수의 푸른 눈알을 굴려보아라! 벗 ‘김’이 누워있는 불룩한 무덤위에 조는 듯 피어있는 머리 숙인 할미꽃이라든가, 아침 햇빛에 잠자던 머리를 들어 아득히 먼 저 끝까지 날마다 푸른 물결 밀려가는 이 아름다운 봄철의 들판이라든가, 그 위에 우뚝 허리를 펴 지나간 시절에게 패전한 흉터가 메일랑 말둥한 움 터오는 나뭇가지들의 누런 새 순이라든가, 저 버들가지 흩날리는 언덕 아래 텀벙 엎더져 눈을 털고 동해바다 넓은 어구로 흘러내리는 성천강의 얼음조각이라든가를…… 으오, 유빙이다! 보는가! 저 얼음장 뒹구는 위대한 물결을! 진실로 미운 것이여! 다시 두 번 어깨를 겨누어 하늘 아래 설 수 없는 정말로 정말로 미운 것이여! 아는가? 세월은 네 품이 아닌 먼 저쪽에서 흐르면서 죽어가는 것 대신에 영구히 새로운 것을 낳고있다. 어제도, 지난해에도, 태고의 옛날에도, 그리고 끝 모를 먼 미래에까지도…… 정말로 가을에 아프고 쓰라린 기억은 한번도 누런 풀숲에서,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얼굴을 붉히는 할미꽃의 용기를 꺾지는 못했었고, 거센 동해의 산 같은 격랑도 삼동 긴 겨울 길 넘게 얼어붙은 빙하를 녹여 하구로 내려 미는 한 오리 성천강의 가냘픈 힘을 막아본 적은 없었다. 하물며 이른 봄의 엷은 바람으로 어찌 새싹 푸르러 손뼉같은 큰 잎새 피어, 태양과 함께 청공 아래 허덕이는 여름철의 기름진 성장의 힘을 누를 수 있겠는가? 모진 바람 지동 치는 암흑한 언덕 위에 죽은 듯 엎더진 살아있는 모든 것의 수없는 슬픔을 영구히 벗지 못할 겉옷 속에 장사지내려던 눈 덮인 들 너와 함께 태초로부터 불타던 태양까지가 그의 힘을 잃고 헛되이 긴 동안을 글러가던 그 끝없이 차고 흰 벌판 위에 일제히 생탄의 마당으로 잡아 일으킬 이 세월의 영원한 흐름을, 철수의 위대한 힘을, 닥쳐오는 봄을! 살아있는 모든 것의 원수여! 말해보라! 막을 수 있겠는가? 주리라! 주검의 악령이여! 네 탐내는 모든 것을…… 가을의 산야가 네 위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눈 속 깊이 내어 맡기듯…… 그러나 종달새 우는 오월 푸른 하늘 아래 나팔을 불며 군호 소리 높이 두 발을 구르고 잠자는 모든 것을 일으키고, 침묵한 온갖 것의 입을 열어 절규의 들로 불러 내이며, 죽어진 그 시절의 모든 목숨을 무덤으로부터 두손을 잡아 일으킬, 저 열길 얼음 속에서도 아직 산 것을 자랑하는 어린 물고기의 마음이, 한 줄기 빛깔도 엿볼 수 없는 이 어두운 땅속에서, 두 주먹을 고쳐쥐며 높이고 있는 ‘한니발’의 굳은 맹서를…… 암흑이여! 주검의 어머니인 대지여! 말해보라! 꽉 그 목을 눌러 영구히 숨줄을 끊을 수 있겠는가? 자거라! 이제는 두번 살아 우리 앞에 나서지 못할 사랑하는 옛 벗 ‘××’아! 고이 자거라! 지금 살아서 죽는 우리들과 함께. 누가 감히 네가 영구히 죽었다고 말하겠는가? 불길은 타서 숯등걸 되고 그것은 일어날 새 불의 어머니 되나니, 벗아! 저 컴컴한 골짝 속에서도 오히려 머지않아 닥쳐올 대양의 큰 파도 소리를 자랑하며, 묵묵히 흐르는 실낱 냇물이 속삭이는 옅은 콧노래 가운데, 오는 날의 모든 것을 들으면서 고이 두 손을 가슴에 얹어라! 이 아래 한길 되는 어둔 땅 속에 지금 대양의 절규 대신에 잠잠한 침묵에 내가 잠자고 있노라!

주석

성천강(城川江) 함경남도 함흥을 흐르는 강. 시인의 고향 가까이로, 벗 ‘김’이 묻힌 땅을 가리킨다.

유빙(流氷) 물 위를 떠내려가는 얼음덩이. 봄이 와 강이 풀리는 표징.

한니발 고대 카르타고의 명장.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친 불굴의 의지로, 여기서는 끝내 굽히지 않는 맹세의 상징.

생탄(生誕) 생명이 새로 태어남. 죽음의 들판을 다시 살려 내는 봄의 부활.

벗 ‘김’ / ‘××’ 죽은 동지를 가리킨다. 검열을 피하려 이름을 ‘김’ 또는 복자(××)로 가렸다.

심상·해설

벗을 거둬 간 죽음(대지)을 향해 '탐내는 모든 것을 주리라' 외치며 청년의 온몸과 정열까지 내던지는 격정의 절규가 이어진다. 그러나 빙하를 녹이며 흐르는 성천강과 닥쳐오는 봄을 빌어, 죽음으로도 끊을 수 없는 세월과 부활의 의지로 솟구쳐 오른다.

낭독 지시

Style: 죽음의 대지를 향한 도전장처럼, 거대한 분노로 굽이쳐 몰아치다, 봄·유빙 대목에서 환희로 치솟고, 끝 자장가는 비장하게 잦아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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