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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
1900-1910년대

안개 속

임화 · 1900-1910년대
하늘 땅 속속들이 먹 위에 먹을 갈아 부었다. 발부리조차 안 뵌다만, 나는 아직도 외롭지 않다. 비가 흩뿌리더니, 우뢰가 요란하고, 번개가 날카롭고, 드디어 내 잠자는 마을, 뭇 집 들창이 캄캄하다. 길 가 불들도 꺼졌다. 별도, 달도,……. 밀물처럼 네가 쓸어와, 다시는 불도 내일 낮도 없을 듯하더라만, 나의 마을 사람들은 대견하더라! 앞을 다투어 깜북 깜북 여러 들창이 환하니 흐득임을 보아, 오무러졌다 펴는 불촉이 분명타. 길 가는 나그네들이 나비떼처럼 불 가로 찾아든다. 볼이 패이고 뼛골이 드러났다. 별빛보다 희미한 들창이 그들에 역력한 고난을 비친다. 정녕 몇 사람을 너는 험한 길 위에 죽었을 게다. 네 손은 아귀가 세고 끈끈하다. 부썩 힘을 주어 움키면, 아무것이고 다 부여잡히리랴만, 모래알처럼 손가락 틈을 새는 것이 있으리라. 꼭 쥐면 쥘수록 틈이 번다. 안개 끼인 밤에는 호롱불이 보름달 같으니라. 물론 나그네들이야 집도 없고 길도 멀다. 그 대신 희망이 꽉 찼더라. 눈동자는 굴속 같아야, 한 점 불이 별 같고, 가슴은 한층 밝아, 밤새도록 환히 아름답더라. 내야 눈마저 흐리다만, 아직 외롭지 않다.

주석

들창(窓) 벽 위쪽에 위로 들어 올려 여는 작은 창.

불촉 등잔·호롱의 불꽃. 불심지 끝에서 타오르는 빛.

아귀 손으로 무엇을 움켜쥐는 힘. ‘아귀가 세다’는 쥐는 힘이 강하다는 뜻.

심상·해설

먹을 부은 듯 캄캄한 안개의 밤, 깜빡이는 들창 불빛과 그리로 모여드는 고단한 나그네들을 비춘다. 어둠이 짙을수록 호롱불이 보름달처럼 커 보이듯, 가슴에 품은 희망이 외롭지 않게 한다는 위안이 흐른다.

낭독 지시

Style: 칠흑 같은 어둠을 낮게 속삭이다, 들창에 불 켜지는 대목부터 점점 밝고 따뜻하게, 끝은 잔잔한 확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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