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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모경
1920년대

겨울의 모경

이장희 · 1920년대
큰 거리는 저물은 연기에 젖어 동정(動靜)이 몽롱하고 녹슨 무쇠 같은 둔중(鈍重)한 냄새가 잠겨 흐른다 그러나 가다가는 앓는 소리 은은한 전차(電車)가 물오른 풀잎같은 뾰죽한 신경(神經)을 들어내고 새파란 푸른꽃을 허공(虛空)에 날리기도 한다 길바닥은 얼어서 죽은 구렁이같이 뻐드러졌고 그 위를 새찬 바람이 돛을 달고 달려나면 야릇한 군소리가 눈물에 떨어 그윽히 들린다 잘 지절대고 하이칼라인 제비의 유령(幽靈)이 불룩한 검정 외투(外套)를 휘감고 비틀거리는 사이에 있어서 흐린 은(銀)결같이 희끄무레한 옷 그림자가 고요히 움직인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너머로 핏줄 선 눈알같이 불그레함은 마지막으로 넘어가는 햇볕의 얼굴이 숨어 있음이라 이들 눈에 드는 모든 것이 저마다 김을 뿜어서 그는 환등(幻燈)의 영사막(映寫膜)이며 침울(沈鬱)한 뎃산을 보는듯하다

주석

모경 暮景. 날이 저물 무렵의 경치. 시 제목 '겨울의 모경'은 겨울 해질녘 풍경을 뜻한다.

하이칼라 영어 high collar에서 온 말. 서양식으로 멋을 낸 모양이나 그런 사람. 여기서는 전차에서 튀는 불꽃·도시 풍경을 세련된 제비에 빗댄 표현.

환등(幻燈) 그림이나 사진에 빛을 비추어 막(스크린)에 크게 비추는 장치. 흐릿하고 몽환적인 도시 풍경을 영사막에 비유함.

뎃산 데생(dessin). 연필 등으로 그린 소묘. 색이 빠진 침울한 흑백 그림 같은 풍경을 가리킨다.

심상·해설

해질녘 겨울 도시가 연기에 젖어 흐릿하고, 전차가 푸른 불꽃을 튀기며 얼어붙은 길 위로 핏빛 노을이 번지는, 흑백 데생 같은 음울하고 몽환적인 도회 풍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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