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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1940-1950년대

제4장

조기천 · 1940-1950년대
1 우등불이 밤을 태운다- 무쇠같이 장백을 내려누르는 캄캄한 밀림의 밤을! 끝없이 몰아 죄여드는 모진 어둠 머릿속에도 흑막이 드리운 듯- 허나 불길은 솟고 불꽃은 튀고 솟아서는 태우고 죽고 죽고는 또 솟거니 이름모를 결사의 싸움이 이 밀림 속에 벌어진 듯. 빨치산 우등불- 어느 때 한 번 사람이 그 불길에 두 손을 쬐었다면 어찌 줄달음치는 피 속에서 생을 읊조리는 그 기쁨이 식어질 수 있으랴! 어느 때 한 번 사람이 그 불꽃튀는 소리 들었다면 어찌 그 소리소리 마음의 줄을 울리며 희망과 신념을 길이 일으키지 않으랴! 빨치산 우등불- 그것은 집이었고 밥이었다 그것은 달콤한 잠자리였고 그것은 내일의 투쟁- 하물며 ≪토벌≫의 철망을 헤치고 사지를 육박으로 지났으니 그것은 승리의 상징, 야반의 노도 속 반짝이는 구원의 등대! 2 초병들도 긴 하품에 눈시울이 아파질 무렵 빨치산부대 깊은 잠 들다 이슬 속 고달픈 이 잠자리 몇 날 만에 발 펴게 되었는고? 어제날의 상처 아직도 저리지만 나흘째나 굶주렸지만 또 앞날의 길 즐펀하지만 이 밤엔 우등불이 붙거니 깊은 잠 안식의 잠- 그런데 한 분만이 잠 못 들고 우등불 옆에 비스듬히 앉아 밤가는 줄 모르네- 이런 밤엔 그이는 책을 보았다- 봄날의 아지랑인 양 희망이 멀리서 한끝 부풀 때도 그이는 책을 보았다. 불안의 구름장이 가슴가에 낮게 떠돌고 어느 구석에선가 절망이 머리 들 때도 그이는 책을 보았다- 그러면 새 힘을 얻고 목적을 보았다. 혁대를 냄비에 끓이는 냄새 주린 창자를 놀라게 할 때도 이 책을 보았고 먼 옛날 그이의 어린 시절이 흘러간 어느 때나 그리운 고향의 옛집- 다복솔에 덮인 뒷산 밑 그 쓰러져가던 옛집이 세월과 망각을 헤치고 또렷이 떠오를 때도, 또 어느 봄날 부엌에서 미음드레 가리며 한숨짓던 수심에 어린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의 쪽문을 열고 들어설 때도 그이는 책을 보았다- 그러면 새 힘을 얻고 목적을 보았다. 이 밤에도 글줄을 밟으며 훨-훨- 걸어가는 생각- ≪우리 비록 적지만 우리 비록 굶으며 피 흘리지만 인민이 우리를 받들거든, 새 세상의 성벽을 영원에 뻗치며 부르주아와 침략을 우리 물리치거든, 백일하에 빛나 빛나는 창조의 휘황한 성진이 백두에 퍼지어 누리에 비치노니 우리의 신념은 크나큰 화염이 되어 캄캄한 조국의 땅 밝히리라! 내 이렇게 마음조려 기다리는 식량부대도 돌아오리! 철호의 소식도 내 들으리!≫ 밤새도록 어둠과 싸우던 우등불도 휴전인 양 수그러졌는데 오로지 그 옆에 앉았던 한 분만이 가볍게 일어서며 ≪어! 날이 밝는구나!≫ 동편 하늘은 새벽을 이룩이룩 걷어 이고 쉽사리도 일어선다, 일어선다! 3 그렇게 기다리던 식량부대 아침에야 돌아왔다- 얻은 것이란 소 두 마리뿐, 나물죽 생각만도 두 가슴을 재는 듯 파내리거니 대장도 알기 전에 소잡을 차림 서둘렀다- 씩-씩- 칼도 갈고 모닥불도 푸- 푸 피우고. 대장이 왔을 때는 모여든 빨치산들 눈살에 소 두 마리도 어둥지둥 정신부터 잃은 듯- 목재소 일본소로는 살도 푸둥 굴레도 호함졌다. ≪소는 어디서 가져왔소?≫ 대장의 묻는 말. ≪삼밭골 목재소 어귀에서…≫ 소대장 순선의 대답. 대장은 굴레를 보았다- 동전을 단 굴레. 수놓은 굴레… 아낙네의 솜씨 독특한 코뚜레- 민족의 빛깔- 어김없이 일본소는 아니다 ≪동무들! 우리 빨치산들이 어느 때부터 마적이 되었는가? 어느 때부터 평민의 재산을 노략했는가? 이 굴레를 보라- 이 소는 조선농민의 소다 저 소는 중국농민의 소다≫ 이렇게 김대장이 말했다. 이것은 소를 돌려보내라는 명령 이것은 산채를 캐어 아침 하라는 명령. 빨치산들이 산채를 더듬으며 산조하듯 퍼졌을 때 살진 소 두 마리 가담가담 풀을 뜯으며 산등 타고 마을로 내려간다, 어떤 화를 지날지도 모르며 또 어떤 불행 있을지도 모르며… 4 빙- 둘러선 빨치산들… 그 앞에 말없이 선 김대장… 머리 위에 휘도는 싸늘한 기운 가을서리 내리듯. 아침햇발도 내리듯. 아침햇발도 눈치채고 밀림으로 삼가 기어드는 듯- ≪뉘가 소를 죽였는가?≫ 대장이 낮게 묻는다. ≪… … …≫- 군중은 잠잠 ≪뉘가 소를 죽였는가?≫ 낮고도 얼구는 목소리. 그래도 대답은 없었다 높다란 침묵이 잉- 빨치산들 고막을 친다 ≪사령관동지! 제가 죽였습니다…≫ 한걸음 나서며 말하는 청년빨치산 최석준. ≪네가?≫ 빨치산들이 놀란다 싸움에서도 대담한, 척후로도 이름있는 석준이… 더없는 전우라던 석준이… ≪네가 어찌?≫ 빨치산들이 더 분해한다. 새파랗게 고민에 질린 땅에 수그러진 그의 낯- ≪사령관동지도 우리도 나흘째나 굶게 되니…≫ 그러나 군중 속에서 누군지- ≪응, 변명을 하는구나!≫ 또 누군지- ≪너는 명령을 거역했다!≫ 소대장 순선이 주먹을 들며- ≪너는 일제를 도와준다!≫ 석준이 번쩍 머리 들며- ≪일제를 도와준다고?≫ ≪그렇다!≫ ≪내가?≫ ≪그렇다, 네가!≫ ≪아니 내가 일제를 도와 준다고?≫ ≪그렇다 네가! 네가!≫ ≪그렇다면…≫ 잘칵- 총 재우는 소리 ≪자, 나는 죽어 마땅하니…≫ 석준이 총박죽을 내민다, ≪기척!≫- 대장의 호령소리 철판으로 밀림을 들부수는 듯 빨치산들은 선 자리에 붙은 듯 오로지 무거운 침묵만 꽈악 뚜껑인 듯 내려누르고 5 ≪가마 속의 물은 끓다가도 없어진다- 원천이 없거니- 허나 냇물은 대하를 이룬다. 동무들! 우리는 대하가 되련다 바다가 되련다 우리의 근간도 민중 속에, 우리의 힘도 민중 속에 있다! 민중과 혈연을 한가지 한 빨치산임을 우리 잊었는가? 우리 이것을 잊고 어찌 대사를 이루랴! 민중과의 분리- 이것은 우리의 멸망, 이것은 일제들이 꾀한다 우리 이것을 모르고 어찌 대사를 이루랴≫ 기척해 선 빨치산들 쩌엉- 가슴을 가르고 치밀어 솟는 의분! ≪이제도 죄책을 모르겠는가?≫ 석준에게 대장이 하는 말. ≪압니다!≫ 석준의 대답. 첫서리 맞은 풀- 그것도 이것보다는 생생하리… ≪나는 죄책을 잘 압니다≫ 석준의 떨리는 목소리… 재가 내어돋은 입술… 허나 이제도 처벌의 고개 어떻게 석준이 그 고개 넘으려나! 빨치산들은 잘 안다 오직 한 가지뿐- ≪총살≫ 폭풍우 전 짧은 순간… 침묵…침묵…침묵… ≪임자를 찾아 소값을 주라!≫ 이렇게 명령하고 대장이 돌아선다. 새파랗던 석준의 낯에 몇 줄기 붉은 빛, 빨치산들의 낯에도 햇발이 비친다. 어떠한 커다란 충직과 신념이 빨치산들의 가슴에 드러누워 툭-툭 어리광치듯 심장을 쥐어박는다. 6 빨치산부대 열흘 만에 동남으로 길 떠났다, 산촌사람들도 승벽내어 식량도 걸메올리고 부상된 전사도 치료하고 소대장을 몇십 리 보내어 ≪토벌대≫도 홀려가고- 허지만 밤마다 밤마다 대장은 잠 못 들더니 어느날인가 약재 짊어진 노동복 입은 중로인이 왔을 때 작은 지도 대장의 손에 쥐었더니 그 이튿날 아침 동남으로 길 떠났다. 동남의 길- 앞에는 고개 뒤에 또 고개 골짜기도 많고 멀기도 하련만 어느 뉘가 괴롭다 하랴! 어느 뉘가 뒤서자 하랴! 앞으로! 앞으로! 승냥이도 추위에 얼어죽는 때 빨치산들이 이 길을 그리었다- 그러면 새 움이 마음속에 자라났다. 나날이 주림이 모지름할 때도 빨치산들이 이 길을 그리었다- 그러면 큰 낟가리 가슴속에 자라났다, 돌아갈 길이 잡초에 막히고 마음 한바닥에 재만 무질 때도 빨치산들이 이 길을 그리었다- 그러면 희망의 모닥불이 앞길을 가리켰다. 동남의 길- 자나깨나 그리던 이 길, 죽어도 한 번은 가겠다던 살아서 살아서 못간다면 죽어서라도 기어코 가겠다던 조국으로 가는 길, 싸움의 길- 빨치산들이 길 떠났다 동남으로 길 떠났다. 앞으로! 앞으로! 오오! 앞에는 압록강! 압록강!

주석

제4장 장편 서사시 『백두산』(조기천, 1947)의 넷째 장. 모닥불 곁에서 밤새 책을 읽는 김 대장과, 명령을 어기고 농민의 소를 잡은 석준이를 둘러싼 군율(軍律) 일화를 그린다.

우등불 한데에 피워 놓고 여럿이 쬐는 모닥불.

초병(哨兵) 보초를 서는 병사.

부르주아 자본가 계급. 원문 '부르이'는 그 약칭. 무산계급 혁명 문학의 상투적 적대 대상이다.

성진(星辰) 별. '창조의 휘황한 성진'은 새 세상을 밝히는 빛을 비유한다.

굴레/코뚜레 소를 부리려고 머리에 씌우는 줄(굴레)과 코에 꿰는 고리(코뚜레). 그 모양과 장식으로 일본 소가 아니라 조선·중국 농민의 소임을 알아본다.

마적(馬賊) 말을 타고 떼 지어 다니며 노략질하던 도적. 민중을 약탈하지 않는 빨치산과 대비된다.

산채(山菜) 산나물.

척후(斥候) 적의 형편을 몰래 살피는 일, 또는 그 일을 맡은 병사.

기척 여기서는 '차렷'에 해당하는 구령. 동작을 멈추고 부동자세를 취하라는 호령이다.

대하(大河) 큰 강. 작은 냇물이 모여 큰 강을 이루듯, 빨치산이 민중과 하나 되어야 함을 비유한다.

승벽(勝癖)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미. '승벽내어'는 앞다투어 나서는 모양.

심상·해설

캄캄한 밀림을 밝히는 모닥불 곁에서 밤새 책을 읽으며 신념을 다지는 김 대장, 농민의 소를 잡은 잘못을 군중 앞에서 다스리는 긴장된 군율의 한밤, 그리고 압록강을 향해 동남으로 떠나는 행군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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