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1950년대
제5장
1
총소리 난 지도 이슥할 제
추격의 마지막 총소리-
철호 걸음 멈춘다.
심장이 악쓰며 미지의 길 달리고
목에서도 재불이 날리고-
그런데 온 삶은 청각에 올랐거니
달빛 아래 휘늘어진 수림 속
나무들만 우중충-
사방은 죽은 듯…
그때에야 껴안은 소년을
땅 위에 삼가 내리며-
≪영남아! 영남아!≫
철호 낮게 부르짖는다.
달빛에 해쓱한 소년의 낯
괴로운 잠꼬대인 양 가느다란 신음…
가슴에서 흐르는 피
저고리섶 적신다…
옷소매 끊어 상처 싸매며-
≪영남아! 우리 가자!
우리 솔개골로 가자!≫
허나 소년은 눈 감고 말이 없다
어머니 앓는 애를 안아 일으키듯
철호 소년을 안고 일어선다.
2
이 밤은 불운의 밤-
이 밤에 마지막 보고 가지고
철호와 영남이 압록강 건너려다
일본수비대의 추격에 들었다.
이 밤은 불행의 밤-
그러나 이 살판치는 불행을
한 사람만 알고 있으니,
영남이는 정신 잃어 모르고
철호만 그 불행을 한아름 가득 안고
허둥- 지둥
밤길로 동북으로 나간다,
솔개골로 가려고…
영남이를 살리려고…
밤길-
밤길에도 산속에 밤길…
뒤에는 감옥과 죽음을 두고
앞에선 이름도 모를 위험이
고양이같이 모퉁이 지키는데
죽어가는 소년을 안고
터지는 가슴을 눅잦히며
한 걸음, 두 걸음
걸음마다 애끊어지는
산속에 밤길, 철호의 길!
이 나라의 맘있는 길손들이여,
몇 번이나 그대 이런 밤길 걸었느뇨?
그대 정녕코 철호의 길 모를 리 없거늘
맘속에라도 이곳에 오라-
이곳에 와서 철호를 도와주라,
손톱까지 적시는 땀
철호 몰래 씻어주라!
고통의 밤길, 이 밤길
어느 뉜들 그 이름이나 알리오만
그러나 이 나라에 열리고야 말
그 삶의 대로에 잇닿아지리
아무도 모르게 이름도 없이…
3
몇 리나 걸었는지도 모른다
몇 시나 걸었는지도 모른다
오로지 하나의 생각뿐-
솔개골로 빨리 가자!
영남이를 살리자!
새벽을 잡아서
화전골 첫 어귀에 들어섰을 때
영남이 정신 차렸다
그의 첫 말-
≪보고를… 보고를…≫
그담 물을 달라고…
철호는 물 얻으러 달려가고
소나무 밑 이름모를 봄풀 위에
반듯이 누워 있는 소년-
그 크다란 불타는 두 눈 부릅뜨고
검푸른 하늘 노려보다가
벌떡 일어나며
두 주먹 높이 들며-
≪끝까지 싸우라!
조선독립 만세!≫
높이 부르짖었다.
이렇게 총에 맞은 갈매기
바위에 떨어져 부닥쳐도
꺾어진 나래를 퍼덕이며
생과 투쟁에 부른다,
그렇게 마지막 부르짖은 소년
다시 스르르 모로 쓰러진다.
입술로 두 줄기 피 흘러서
풀잎에 맺힌 밤이슬에 섞인다…
눈동자에 구름장이 얼른…
바람이 우수수-
소나무를 흔든다…
4
철호 무덤을 판다,
소나무 밑에 영남의 무덤을…
파다가는 한숨 쉬고
한숨 쉬고는 또 파고…
어찌 이곳에 그를 묻을 줄 알았으리-
그 삶을 즐기던 소년을,
이 나라의 강물인 양 그 맑은 마음을,
그 조국애에 끓던 심장을!
철호 무덤을 팠다-
소나무 밑에 전우의 무덤을
≪잠자라 동무야!
우리들이 우리들이
원수 갚으리라!≫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누런 흙에 점점이 떨어진다.
장백의 높고 낮은 고개고개에
이 무덤이 첫 무덤 아닌 줄이야
우리 어찌 모르랴!
침략의 피 서린 밤이
이 나라에 칭칭 걸치었거니
새날을 위해 싸우다 죽은 이
헤어보라 몇 만이나 되는고?
어느 고개 어느 골짜기에
어느 나무 어느 돌 밑에
이름도 없이 그들이 묻히었노?
이 나라의 나무꾼들이여,
부디 삼가 나무를 베이라-
우리 선열의 영을 그 나무 고이 지키는지 어이 알리,
부디 삼가 길옆에 놓인 돌 차지 말라-
우리 선열의 해골이
그 돌 밑에 잠들었는지 어이 알리!
5
오솔길,
샘터로 올라가는 오솔길.
아침안개 휘휘 발길에 감기는 오솔길-
꽃분이 물 길으러 올라간다
올라가노라면 돌담불-
순사 왔던 그날 밤
등사기 감추어둔 돌담불…
아침이고 저녁이고
이곳을 지날 때면
밤길 떠난 철호의 모습 떠오르니…
≪시방은 어느 곳에 계신지?
떠나신 후 소식조차 없으니
무사히나 일하시는지?≫
왜 그의 모습이
날 갈수록 더 그리워질까?
왜 이리도 가슴이 안타까울까?
떨어지는 걸음걸이…
무엇인지 맘속에 무겁게 처매운
돌담불을 지나면 샘치바위
진달래꽃에 불그스레한-
그 밑에는 샘터…
밤새 떨어진 꽃이 샘물을 덮었다.
꽃분이 주저앉아
두 손으로 꽃잎 거둔다
한 줌 거두어 돌 위에 놓고
두 줌 거두어 돌 위에 놓고…
산란하고 들뜨는 마음
(만날 수는 있을까?)
샘물을 바라보는 처녀의 생각,
거울 같은 물속에서
어글어글한 두 눈
수심을 낱낱이 말하는 듯-
≪에그! 내 무슨 생각을!≫
낯을 붉히는 처녀.
세 번째 줌 거두어 돌 위에 놓으려다
처녀 놀라 멈춘다-
바위 옆에 그가 섰어라!
≪철호!≫-처녀의 부르짖음
놀라움과 기쁨에 섞인.
쥐었던 꽃뭉치 우수수 떨어져
샘물을 다시 덮는다…
그러나 기진하고 어이없는 철호의 낯
꽃분의 숨결을 막는다-
≪무슨 일에?≫
≪간밤에 영남이 죽었수…≫
≪영남이? 아이구 기차게두!…≫
처녀의 심장 옆에서
무거운 아픔이
꿈틀 돌아눕는다
또 돌아눕는다…
한시 후에 철호 떠나고
꽃분이도 길 떠났다,
H시로 간다고,
전에 없이 꽃 팔러 간다고
진달래꽃 한 임 이고.
몇몇 해 정성껏 자래우던
샘터 진달래도 모조리 뜯어
한떨기도 남기지 않고…
주석
제5장 장편 서사시 『백두산』(조기천, 1947)의 다섯째 장. 추격을 받아 총상을 입은 소년 연락원 영남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죽고, 철호가 그를 묻은 뒤 샘터에서 꽃분이와 다시 만나는 비극적 장면이다.
수림(樹林) 나무가 우거진 숲.
재불 여기서는 '단내'의 뜻. 숨이 턱에 차 목에서 나는 마르고 뜨거운 기운.
일본수비대 일제가 국경·요지에 둔 일본군 경비 부대.
눅잦히며 '눅이다(누그러뜨리다)'에서 온 말. 터질 듯한 가슴을 가라앉히는 모습.
선열(先烈)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숨진 옛 열사들.
돌담불 돌이 무더기로 쌓인 곳, 돌무더기.
샘치바위 샘 곁에 솟은 바위를 가리키는 말.
기차게도 '기막히게도'의 뜻. 어이없고 기가 막힘을 나타내는 감탄.
한 임 머리에 인 짐 하나, 곧 한 아름. '이다(머리에 얹다)'에서 온 말.
자래우던 '자래우다(자라게 하다, 기르다)'의 활용형. 정성껏 가꾸던.
심상·해설
달빛 어린 숲속을 총상 입은 소년을 안고 헤매는 철호, 새벽 봄풀 위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숨지는 영남, 진달래 떨어진 샘터에서 비보를 안고 마주 서는 꽃분이의 애절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