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1950년대
머리시
삼천만이여!
오늘은 나도 말하련다!
≪백호≫의 소리없는 웃음에도
격파 솟아 구름을 삼킨다는
천지의 푸른 물줄기로
이 땅을 파몰아치던 살풍에
마르고 탄 한가슴을 추기고
천년 이끼 오른 바위를 벼룻돌 삼아
곰팡이 어렸던 이 붓끝을
육박의 창끝인 듯 고루며
이 땅의 이름없는 시인도
해방의 오늘 말하련다!
첩첩 층암이 창공을 치뚫고
절벽에 눈뿌리 아득해지는 이 곳
선녀들이 무지개 타고 내린다는 천지
안개도 오르기 주저하는 이 절정!
세월의 유수에
추억의 배 거슬러 올리라-
어느 해 어느 때에
이 나라 빨치산들이 이 곳에 올라
천심을 떠받으며
의분에 불질러
해방 전의 마지막 봉화 일으켰느냐?
이제 항일의 의로운 전사들이
사선에 올랐던 이 나라에
재생의 백광 가져왔으니
해방사의 혁혁한 대로
두만강 물결을 넘어왔고
백두의 주름주름 바로 꿰어
민주조선에 줄곧 뻗치노니
또 장백의 곡곡에 얼룩진
지난날의 싸움의 자취 역력하노니
내 오늘 맘놓고 여기에 올라
삼천리를 손금같이 굽어보노라!
오오 조상의 땅이여!
오천년 흐르던 그대의 혈통이
일제의 칼에 맞아 끊어졌을 때
떨어져나간 그 토막토막
얼마나 원한이 선혈로 뒹굴었더냐?
조선의 운명이 칠성판에 올랐을 때
몇만의 지사 밤길 더듬어
백두의 밀림 찾았더냐?
가랑잎에 쪽잠도 그리웠고
사지를 문턱인 듯 넘나든 이 그 뉘냐?
산아 조종의 산아 말하라-
해방된 이 땅에서
뉘가 인민을 위해 싸우느냐?
뉘가 민전의 첫머리에 섰느냐?
쉬- 위-
바위 위에 호랑이 나섰다
백두산 호랑이 나섰다
앞발을 거세게 내뻗치고
남쪽 하늘을 노려보다가
≪따- 웅-≫ 산골을 깨친다
그 무엇 쳐부수련 듯 톱을 들어
≪따- 웅-≫
그리곤 휘파람 속에 감추인다
바위 홀로 솟아
이끼에 바람만 스치어도
호랑이는 그 바위에 서고 있는 듯
내 정신 가다듬어 듣노라-
다시금 휘파람소리 들릴지,
산천을 뒤집어 떨치는
그 노호소리 다시금 들릴지!
바위! 바위!
내 알 리 없어라!
정녕코 그 바위일 수도 있다
빨치산 초병이 원수를 노렸고
애국열사 맹세의 칼 높이 들었던 그 바위
빨치산 용사 이 땅에 해방의 기호 치던
장백에 솟은 이름모를 그 바위
또 내 가슴 속에도 뿌리박고 솟았거니
지난날의 싸움의 자취 더듬으며
가난한 시상을 모으고 엮어
백두의 주인공 삼가 그리며
삼천만이여, 그대에게
높아도 낮아도 제 목소리로
가슴헤쳐 마음대로 말하련다!
주석
백두산 조기천이 1947년에 발표한 장편 서사시 『백두산』. 항일 빨치산 투쟁을 김일성을 주인공으로 형상화한 북한 초기의 대표 서사시로, '머리시'는 그 서시(序詩)다.
삼천만 당시 우리 민족 전체의 인구를 어림한 말. 온 겨레를 부르는 호칭이다.
백호(白虎) 백두산 천지에 산다고 전해지는 흰 호랑이. 민족의 기상을 상징한다.
천지(天池) 백두산 정상의 화구호. 푸른 물이 가득한 큰 못이다.
빨치산 적의 배후에서 싸우는 비정규 유격대. 여기서는 항일 무장 유격대를 가리킨다. 원문 '빨찌산'은 북한식 표기.
칠성판(七星板) 관 속 시신 밑에 까는, 북두칠성을 그린 널빤지. '칠성판에 올랐다'는 죽음에 임박했음을 뜻한다.
조종(祖宗)의 산 모든 산의 으뜸이 되는 산. 백두산을 민족의 시조가 되는 산으로 높여 부른 말.
민전(民戰) 민주주의민족전선. 1946년 결성된 좌익 계열 정치 연합 단체.
장백(長白) 백두산을 달리 이르는 이름. 장백산맥 일대를 가리키기도 한다.
기호(記號) 여기서는 신호(信號)의 뜻. 봉화 따위로 보내는 약속된 표시.
심상·해설
천 년 이끼 낀 백두산 절정 천지에 올라 항일 빨치산의 봉화를 회상하고, 바위 위에 솟아 남쪽 하늘을 노려보며 울부짖는 흰 호랑이를 마주하는 웅혼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