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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1940-1950년대

제1장

조기천 · 1940-1950년대
1 고개 뒤에 또 고개- 몇몇이나 있으련고? 넘어넘어 또 넘어도 기다린 듯 다가만 서라! 한 골짜기 지나면 또 다른 골짜기- 이깔로 백화로 뒤엉켜 앞길 막노니 목도꾼이 고역에 노그라지듯 골짜기는 으슥히 휘늘어져 있어라! 울림으로 빽빽하여 몇백 리 백설로 아득하여 몇천 리- 사나운 짐승도 발길 돌리기 서슴어 하고 날새도 고적에 애태우다 날아날아 떠나고야 마는 장백의 중중심처 홍산골- 절벽 사이 칼바람에 쌓인 눈 위에 뚜렷이 그려진 이 발자국, 어디론지 북으로 북으로 가버린 가없는 외로운 이 발자국- 어느 뉘의 자취인가? 눈보라에 길 잃었던 포수 절망에 운명 맡긴 자취인가? 어느 뉜지 북으론 왜 갔느뇨? 북에선 백두산이 백발을 휘날리며 한설을 안아 뒤뿌려치는데, 서릿발로 한숨 쉬고 있는데! 2 눈 위에 뚜렷한 이 발자국 눈여겨 살피라- 그 속엔 절망의 흔적 없으리, 지난 밤 흰 두루마기 사람들 설피 신고 이곳 꿰어 북으로 갔으니 사람은 몇백이나 되어도 발자국은 하나만 남겨두고- 그런데 오늘은 이 발자국 허물며 수십의 일제의 무리 허리까지 눈무지에 빠지며 ≪토벌≫의 큰 불 밀림에 지르련다 맨 앞엔 군견 두 마리 날뛰고 그 뒤엔 안경이 번뜩이고 또 그 뒤엔 서리어린 총부리와 총부리- ≪대체 한 사람의 발자국뿐- 모두 어디로 갔느냐 말이야!≫ 절벽에 안경을 두리번두리번- 맨 앞놈의 중얼거림 ≪글쎄요… 신출귀몰은…≫ 옆놈의 대답 끝나기도 전에 ≪땅≫- 총소리 얼어든 대기를 깨뜨린다. ≪안경≫이 눈에서 다리도 못 뺀 채 경례나 하듯이 거꾸러진다. 3 그다음… 그담엔 홍산골이 터졌다- 총소리, 작탄소리, 기관총소리, 놈들의 아우성소리! 그담엔 절벽이 무너졌다 다닥치며 뛰치며 부서지며 바윗돌이 골짜기를 쳐부순다, ≪만세!≫ ≪만세!≫- 골안을 떨치며 산비탈에 숨었던 흰 두루마기들 나는 듯이 달려내렸다 여기서도 돌격의 ≪악!≫ 저기서도 ≪악!≫ ≪악!≫ 설광과 마주치는 날창 번개같이 서리찬 하늘을 찢는다. ≪동무들! 한 놈도 놓치지 말라!≫ 이것은 작렬되는 육박의 첫 구령소리, 4 산비탈 바위 위에 청년 한 분 버쩍 올라선다 후리후리한 키꼴에 흰 두루마기자락이 대공으로 솟아오르려는 거센 나래같이 퍼덕이는데 온몸과 팔과 다리- 모두 다 약진의 서술에 불붙고 서릿발 칼날의 시선으로 싸움터를 단번에 쭉- 가르며 ≪한 놈도 남기지 말라!≫ 그이는 부르짖었다 바른손 싸창을 바위 아래로 번쩍이자 마지막 발악쓰던 원수 두 놈이 미끄러지듯 허적이며 뒤집힌다- ≪한 놈도 남기지 말라!≫ 그이는 재쳐 부르짖었다. 이는 이름만 들어도 삼도 일제가 치떠는 조선의 빨치산 김대장! 이는 장백을 쥐락펴락하는, 태산을 주름잡아 한손에 넣고 동서에 번쩍! 천리허의 대령도 단숨에 넘나드니 축지법을 쓴다고- 북천에 새 별 하나이 솟아 압록의 줄기줄기에 그 유독한 채광을 베푸노니 이 나라에 천명의 장수 났다고 백두산 두메에서 우러러 떠드는 조선의 빨치산 김대장! 5 육박의 불길 멎었을 때 밀림의 주인공 빨치산들 주섬주섬 원수의 무기 거둔다 몇 놈이나 복수의 칼 맞았느냐? 몇 놈이나 빨치산전법에 ≪천황폐하≫도 산산 줄달음에 팽개치고 ≪무사도≫도 갈 데로 가라- 도망치다 엎드러졌느냐? ≪한 놈도 빼우지 않았습니다≫ 철호의 보고 ≪놈들은 이번에도 무장 바치러 왔지!≫ 김대장의 높은 말소리 그리곤 호탕한 웃음소리- ≪하…하…하≫ 함박꽃인 양 그 웃음소리 떨기떨기 내려져 눈 위에 꽂히는 듯! 6 이날 밤에 눈이 내렸다- 하늘도 땅도 바위 벼랑도 홍산골 싸움터도 눈 속에 묻히었다. 이깔밭만 칠월의 꽃피는 삼밭이 되고 대부동 고목에도 때아닌 꽃이 피다 이 밤 빨치산부대 나흘 만에 천막에 들다! 내굴냄새 왜 그리도 구수하고 모닥불도 불꽃채로 품속에 껴안을 듯, 이날 밤 대장이 든 천막엔 새벽까지 등불이 가물가물… 하더니 아침엔 눈보라치는데 정치공작원 철호 먼길 떠났다. 전송하는 대장의 말- ≪철호 조심하오! 믿소!≫ 덤석 틀어쥐는 대장의 손길 심장 속에 햇발을 일으켜라, 해는 눈보라 속에 숨어 있어도 추위는 박달같이 땅을 얼궈도- 7 눈보라…눈보라… 겨울이 마지막 악을 쓴다 무엇이나 찾는 듯 골짜기에서 이리저리 헤매다가도 잣솔을 뒤잡아 흔들며 잉-잉 통곡치누나… 자작나무 휘어잡고 못살겠다 몸부림치다가도 노한 짐승같이 절벽에 달려드누나… 절벽에 달려들어선 쳐부수고 뒹굴고 물어뜯다가는 산등에 올라 미친 듯 아우성치며 하늘도 땅도 휩쓸어가지고 동남으로 줄달음치누나! 눈보라…눈보라… 네야 산 넘고 골 지나 또 지나 압록강까지 이르리라! 너를 동무 삼아 철호 저 산 넘으리! 압록을 건너 조상의 땅 밟으리! 눈보라! 눈보라! 듣느냐? 너는야 철호를 도와주거라- 너도 장백의 눈보라 아니냐! 철호는 멀리도 간단다 국경선 H시도 그의 길에 놓였고 성진 함흥도 가야만 되고, 너 장백의 눈보라야! 불어 또 불어 철호를 감추라- 일제를 기절케 하라. 불어 또 불어 철호를 건네우라 압록강을 건네우라!

주석

제1장 장편 서사시 『백두산』(조기천, 1947)의 첫째 장. 홍산골에서 벌어진 항일 빨치산의 매복 전투와 김 대장의 등장을 그린다.

이깔/잎갈나무 낙엽송. 백두산 일대에 많이 자라는 침엽수.

백화(白樺) 자작나무. 줄기 껍질이 흰 나무.

목도꾼 두 사람 이상이 무거운 짐을 목도(메는 막대)에 걸어 나르는 일꾼.

장백(長白) 백두산과 그 일대 산맥을 이르는 이름.

설피 눈에 빠지지 않게 신 바닥에 덧대어 신는 넓적한 덧신.

토벌(討伐) 무력으로 적이나 반대 세력을 쳐 없앰. 일제가 항일 유격대를 소탕하려 한 작전을 가리킨다.

날창 총구 끝에 꽂는 칼, 곧 총검(銃劍).

싸창 권총을 이르는 말. 중국어 '훙창(手槍)' 계열에서 온 북부 방언.

김대장 항일 빨치산 부대를 이끄는 주인공. 작품은 이를 김일성으로 형상화한다.

삼도(三道) 여러 도(道), 곧 넓은 지역. '삼도 일제'는 곳곳의 일제 세력을 뜻한다.

축지법(縮地法) 도술로 땅을 줄여 먼 거리를 순식간에 다닌다는 술법.

정치공작원 빨치산 부대에서 주민 조직과 선전·연락을 맡은 요원. 주요 인물 '철호'가 이 임무를 맡는다.

성진·함흥 함경도의 도시들. 철호가 거쳐 가야 할 잠입 경로.

심상·해설

눈 덮인 장백산 깊은 골짜기에 찍힌 외로운 발자국을 따라온 일제 토벌대가 흰 두루마기 빨치산들의 매복에 무너지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김 대장과 철호가 등장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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