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인형의 家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자
나는 안다 억제할 수 없는
내 마음에서
온통을 다 헐어 맛보이는
진정 사람을 제하고는
내 몸이 값없는 것을
내 이제 깨닫도다
아아 사랑하는 소녀들아
나를 보아
정성으로 몸을 바쳐다오
맑은 암흑 횡행(橫行)할지나
다른 날 폭풍우 뒤에
사람은 너와 나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 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주석
인형의 家(가)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A Doll's House)」. 아내·딸로만 살던 노라가 한 인간으로 깨어 집을 떠나는 이야기로, 이 시의 바탕이 됨.
위안물(慰安物) 남을 위로하고 즐겁게 해 주는 물건. 여기서는 가족의 노리개로만 여겨지는 여성을 가리킴.
횡행(橫行)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돌아다님, 함부로 판침.
맑은 암흑(暗黑) 역설적 표현으로,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나 실상은 여성을 억누르는 시대의 어둠을 가리킴.
노라 「인형의 집」의 여주인공. 봉건적 굴레를 벗는 근대 여성 해방의 상징.
심상·해설
노리개 같던 삶을 떨치고 '사람'이 되려는 다짐과, 굳게 닫힌 장벽의 문을 열어 노라를 놓아 주라는 외침이, 폭풍우 뒤의 새 세상을 향한 의지로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