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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집시-들병이 철학
1930년대

조선의 집시-들병이 철학

김유정 · 1930년대
안해를 구경거리로 개방할 의사가, 있는가 혹은 그만한 용기가 있는가, 나는 이렇게 가끔 묻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물론 사교계에 용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안해의 출세와 행복을 바라지 않는 자이 누구랴- 그러나 내가 하는 말은 자기의 안해를 대중의 구경거리로 던질 수 있는가, 그것이다. 그야 일부러 물자를 들여가며 이혼을 소송하는 부부도 없지는 않다마는 극심히 애지중지하는 자기의 안해를 대중에 봉사하겠는가, 말이다. 밥! 밥! 이렇게 부르짖고 보면 대뜸 신성치 못한 아귀를 연상케 된다. 밥을 하는 호구가 그리 신성치 못한 것과 같이- 거기에는 몰자각적 복종이 필요하다. 파렴치적 허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매춘부적 애교 아첨도 필요할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야 어디 제가 감히 사회적 지위를 농단하고 생활해 나갈 도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그런 모든 가면 허식을 벗어난 각성적 행동이다. 안해를 내놓고 그리고 먹는 것이다. 애교를 판다는 것도 근자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노동화하였다. 노동하여야 생활하는 여기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즉 들병이다. 그들도 처음에는 다 나쁘지 않게 성한 오장육부가 있었다. 그리고 남만 못하지 않게 끔끔한 희망으로 땅을 파던 농군이었다. 농사라는 것이 얼른 생각하면 한가로운 신사 노릇도 같다. 마는 실상은 그런 고역이 다시 없을 것이다. 땡볕에 논을 맨다. 김을 맨다. 혹은 비 한 방울에 갈급이 나서 눈감고 꿈에까지 천기를 엿본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라도 농작물만 잘 되고 추수 때 소득만 여의하면이야 문제 있으랴. 가을은 농촌의 유일한 명절이다. 그와 동시에 여러 위협과 굴욕을 겪고 나는 한 역경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지주와 빚쟁이에게 수확물로 주고 다시 한겨울을 염려하기 위하여 한 해 동안 땀을 흘렸는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한번 분발한 것이 즉 들병이 생활이다. 들병이가 되면 밥은 식성대로 먹을 수 있다는 것과 또는 그 준비에 돈 한 푼 안 든다는 이것에 그들은 미혹된다. 안해의 얼굴이 수색이면 더욱 좋다. 그렇지 않더라도 농촌에서 항상 유행하는 가요나 몇 마디 반반히 가르치면 된다. 남편은 안해를 데리고 앉아서 소리를 가르친다. 낮에는 물론 벌어야 먹으니까 그럴 여가가 없고 밤에 들어와서는 안해를 가르친다. 재기 없으면 몇 달도 걸리고 총명하다면 한 달포면 끝이 난다. 아리랑으로부터 양산도, 방아타령, 신고산타령에 배따라기- 그러나 게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나의 희망을 부르면 더욱 시세가 좋을 것이다. 이러면 그때에는 남편이 데리고 나가서 먹으면 된다. 그들이 소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예술가적 명창이 아니었다. 개 끄는 소리라도 먹을 수 있을 만치 세련되면 그만이다. 안해의 등에 자식을 업혀가지고 이렇게 남편이 데리고 나간다. 산을 넘어도 좋고 강을 몇씩 건너도 좋다. 밥 있는 곳이면 산골이고 머덩을 불고하고 발길 닿는 대로 유랑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데 예를 잡으면 애급의 집시-(유한민)적 존재다. 한창 낙엽이 질 때이면 추수는 대개 끝이 난다. 그리고 궁하던 농촌에도 방방곡곡이 두둑한 볏섬이 늘려 놓인다. 들병이는 이때부터 자연적 활동을 시작한다. 마치 그것은 볏섬을 습격하는 참새들의 행동과 동일시하여도 좋다. 다만 한 가지 차이라면 참새는 당장의 충복이 목적이로되 그들은 식사 이외에 그다음 해 여름의 생활까지 지탱해 나갈 연명 자료가 필요하다. 왜냐면 농가의 봄, 여름이란 가장 궁할 때이요 따라 들병이들의 큰 공황기다. 이리하여 가을에 그들은 결사적으로 영업을 개시한다. 영업이라야 적수공권으로 유한하며 아무 술집에고 유숙하면 그뿐이지만- 촌의 술집에서는 어데고 들병이를 환영한다. 아무개 집에 들병이 들었다 하면 그날 밤으로 젊은 축들은 몰려든다. 소리 조금만 먼저 해보라는 놈, 통성명만으로 낼 밤의 밀회를 약속하는 놈, 혹은 데리고 철야하는 놈…… 하여튼 음산하던 술집이 이렇게 담박 활기를 띤다. 술집 주인으로 보면 두 가지의 이득을 보는 것이다. 들병이에게 술을 팔고 밥을 팔고- 들병이가 보통 작부와 같은 점이 여기다. 그들은 남의 술을 팔고 보주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막 주인에게 막걸리를 됫술로 사면 팔 때에는 잔술로 환산한다. 막걸리 한 되의 원가가 가령 십칠 전이라면 그것을 이십여 전에 맞는다. 그리고 손님에게 잔으로 풀어 열 잔이 났다 치고 오십 전, 다시 말하면 탁주 이승의 순이익이 삼십 전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잔에 반드시 오 전씩만 받겠다는 선언은 없다. 십 전도 좋고 이십 전도 좋다. 주객의 처분대로 이쪽에서는 받기만 하면 된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한 잔에 일 원씩을 설사 쳐준다 해도 결코 마다지는 않는다. 다만 그 대신 객의 소청이면 무엇을 물론하고 응낙할 만한 호의만 가질 것이다. 들병이는 무엇보다도 들병이로서의 수완이 있어야 된다. 술 팔고 안주로 아리랑타령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아리랑쯤이면 농군들은 물릴 만치 들었고 또 하기도 선수다. 그 아리랑을 들으러 삼사십 전의 대금을 낭비하는 농군이 아니었다. 술 몇 잔 사먹으면 의례히 딴 안주까지 강요하는 것이다. 또 그것이 여러 번 거듭하는 동안에 아예 한 개의 완전한 권리로서 행사케 된다. 만약 들병이가 이에 응치 않는다면 그건 큰 실례다. 안주를 덜 받은 데 그들은 담박 분개하여 대들지도 모른다. 혹은 지불하였던 술값을 도로 내라고 협박할는지도 모른다. 이런 소박한 농군들을 상대로 생활하는 들병이라 그 수단도 서울의 작부들과는 색채를 달리한다. 말하자면 작부들의 애교는 임시변통으로도 족하나 그러나 들병이는 끈끈한 사랑 즉 사랑의 지속성을 요한다. 왜냐면 밤마다 오는 놈들이 거의 동시에 몰려들기 때문에 일정한 추파를 보유치 않으면 당장에 권비백산의 수라장이 되기가 쉽다. 들병이가 되려면 이런 화근을 없애 첫째 눈치가 빨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현금으로 청구해서는 또한 실례가 될는지도 모른다. 보통 외상이므로 떠날 때쯤 해야 집으로 찾아다니며 쌀이고 벼고 콩팥, 조, 이런 곡식을 되는 대로 수합함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두 내외 짊어지고 그다음 마을로 찾아간다. 들병이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빈궁한 농민들을 잠식하는 한 독충이라 할는지도 모른다. 사실 들병이와 관련되어 발생하는 춘사가 비일비재다. 풍기문란은 고사하고 유혹, 사기, 도난, 폭행- 주재소에서 보는 대로 축출을 명령하는 그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면만을 관찰한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들병이에게는 그 해독을 보가하고도 남을 큰 기능이 있을 것이다. 시골의 총각들이 취처를 한다는 것은 실로 용이한 일이 아니다. 결혼 당일의 비용은 말고 우선 선채금을 조달하기가 어렵다. 적어도 사오십 원의 현금이 아니면 매혼 시장에 출마할 자격부터 없는 것이다. 이에 늙은 총각은 삼사 년간 머슴살이 고역에 부득이 감내한다. 그리고 한편 그들의 후일의 가정을 가질 만한 부착 능력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한 의문이다. 현재 처자와 동락하는 자로도 졸지에 이별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모든 사정은 이렇게 그들로 하여금 독신자의 생활을 강요하고 따라서 정렬의 포만 상태를 초래한다. 이것을 조기적으로 조절하는 완화 작용을 즉 들병이의 역할이라 하겠다. 들병이가 동리에 들었다. 소문만 나면 그들은 시각으로 몰려들어 인사를 청한다. 기실 인사가 목적이 아니라 우선 안면만 익혀두자는 심산이었다. 들병이의 용모가 출중나다든가, 혹은 성악이 탁월하다든가 하는 것은 그리 문제가 못 된다. 유두분면에 비녀쪽 하나만 달리면 이런 경우에는 그대로 통과한다. 연래의 숙원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그 호기를 감축할 뿐이다. 들병이가 들면 그날 밤부터 동리의 청년들은 때난봉이 난다. 그렇다고 무모히 산재를 한다든가 탈선은 아니 한다. 아무쪼록 염가로 향락하도록 강구하는 것이 그들의 버릇이다. 여섯이고 몇이고 작당하고 출렴을 모아 술을 먹는다. 한 사람이 오십 전씩을 낸다면 도합 삼 원- 그 삼 원을 가지고 제각기 삼 원어치 권세를 표방하며 거기에 부수되는 염태를 요구한다. 만약 들병이가 이 가치를 무시한다든가, 혹은 공평치 못한 애욕 낭비가 있다든가 하는 때에는 담박 분란이 일어난다. 다같이 돈은 냈는데 어째서 나만 떼놓느냐 하고 시비조로 덤비면 큰 두통거리일 뿐만 아니라 돈 못 받고 따귀만 털리는 봉변도 없지 않다. 하니까 들병이는 이 여섯 친구를 동시에 부마하며 삼 원어치 대접을 무사 공정히 하는 것이 한 비결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결산하면 내긴 오십 전을 냈으되 그 효용 가치는 무려 오십 원에 달하는 셈이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바라고 농군들은 들병이의 심방을 적이 고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들병이로 보면 빈농들만 상대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지주 댁 사랑에서 청할 적도 있다. 그러면 들병이는 항아리나 병에 술을 넣어가지고 찾아간다. 들병이가 큰돈을 잡는 것은 역시 이런 부잣집 사랑이다. 그리고 들병이라는 명칭도 이런 영업 수단에서 추상된 형용사일지도 모른다. 일반 농촌 부녀들이 들병이를 선망과 시기로 바라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자기네들은 먹지도 잘 못하거니와 의복 하나 면면히 얻어 입지 못한다. 양반 댁 사랑에 기탄없이 출입하며 먹고 입고 또는 며칠 밤 유숙하다 나오면 지전장을 만져보니 얼마나 행복이랴- 들병이가 들면 남자뿐 아니라 아낙네까지 수군거리며 마을에 묘한 분위기가 떠돈다. 들병이를 처음 만나면 우선 남편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 술꾼의 상투적 인사다. 그러면 그 대답은 대개 전일에는 금슬이 좋았으나 생활난으로 말미암아 이혼했다 한다. 들병이는 남편이 없다는 이것이 유일의 자본이다. 부부생활이 얼마나 무미건조하였던가를 역력히 해몽함으로써 그들은 술꾼을 미혹케 한다. 그러나 들병이에게는 언제나 남편이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안해가 술을 팔고 있으면 남편은 그 근처에서 배회하고 있다. 들병이의 남편이라면 흔히 도박자요 불량하기로 정평이 났다. 그들은 안해의 밥을 무위도식하며 일종의 우월권을 주장한다. 안해가 돈을 벌어놓으면 가끔 달려들어 압수하여 간다. 그리고 그걸로 투전상을 한다. 술을 먹는다- 이렇게 명색없이 소비되고 만다. 그러나 안해는 이에 불평을 품거나 남편을 힐책하지 않는다. 이러는 것이 남편의 권리요 또는 안해의 직무로 안다. 하기야 노름에 일국 횡재하면 남편뿐이 아니라 안해도 호사로운 생활을 가질 수 있다. 잡담 제하고 노름 밑천이나 대주는 것도 두량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들병이로 나서면 취객 접대도 힘들거니와 첫째 남편 공양이 난사다. 밥만 먹일 뿐 아니라 옷 뒤도 거둬야 된다. 술 팔기에 밤도 새우지만 낮에는 빨래를 하고 옷을 꿰매고 그래야 입을 것이다. 게다 젖먹이나 달리면 강보도 늘 빨아 대야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만도 좋다, 엄동설한에 태중으로 나섰다가 산기가 있을 때에는 좀 곡경이다. 술을 팔다 말고 술상 앞에서 해산하는 수밖에 별 도리 없다. 물론 아무 준비가 있을 까닭이 없다. 까칠한 공석 위에서 덜덜 떨고 있을 뿐이다. 들병이 수업 중 그중 어렵다면 이것이겠다. 이런 때이면 남편은 비로소 안해에게 밥값을 보답한다. 희색이 만면해서 방에 불을 지피고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지성으로 보호한다. 남편은 이 아해가 자기의 자식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다만 자기 소유에 속하는 자식이라는 그 점에 만족할 뿐이다. 상식으로 보면 이런 아해가 제대로 명을 접대할 것 같지 않다마는 들병이의 자식인 만치 무병하고 죽음과 인연은 아해는 다시 없을 것이다. 한 칠일만 겨우 지나면 눈보라에 떡 처업고 방랑의 길로 나선다. 들병이가 아해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기이한 현상이 아니다. 대개 하나씩은 그 품에 붙어 다닌다. 고생스런 노동에도 불구하고 자식만은 극진히 보육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들을 동정하여 아해를 데리고 다니기가 어려운 일이니 길러주마 한다면 그들은 노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고생이 아니라 생활 취미다. 그러다가도 춘궁 때가 돌아오면 들병이는 전혀 한가롭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옛집에 칩거한다. 품을 팔아먹어도 좋고 땅을 파도 좋다. 하여튼 다시 농민 생활로 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가을을 기다린다. 들병이는 어디로 판단하던 물론 정당한 노동자이다. 그러나 때로는 불법 행위가 없는 것도 아니니 그런 때에도 우리는 증오감을 갖기보다는 이종의 애교를 느끼게 된다. 왜냐면 그 법식이 너무 단순하고 솔직하고 무기교라 해학미가 따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남편이 간혹 야심하여 안해의 처소를 습격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에는 방에 들어가 등잔의 불을 댕겨놓고 한구석에 묵묵히 앉았다. 강박하거나 공갈은 안 한다. 들병이니까 그럴 염치는 하기야, 없기도 하거니와- 얼마 후에야 남편은 겨우 뒤통수를 긁으며 “머릴 깎아야 할 텐데-“ 이렇게 이발료가 없음을 장탄하리라. 그러면 이것이 들병이의 남편임을 비몽사몽간 깨닫게 된다. 실상은 죄가 못 되나 순박한 농군이라 남편이라는 위력에 압도되어 대경실색하는 것이 항례다. 그러나 놀랄 건 없고 몇십 전 희사하면 그뿐이다. 만일 현금이 없을 때에는 내일 아침 집으로 오라 하여도 좋다. 그러면 남편은 무언으로 그 자리를 사양하되 아무 주저도 없으리라. 여기에 들병이 남편으로서의 독특한 예의가 있는 것이다. 절대로 현장을 교란하거나 가해하는 행동은 안 한다. 들병이에게 유혹되어 절도를 범하는 일이 흔히 있다. 기십 원의 생활비만 변통하면 너와 영구히 동거하겠다는 감언이설에 대개 혹하는 것이다. 그들은 들병이를 도락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안해로서의 애정을 요망한다. 늙은 홀애비가 묘령 들병이를 연모하여 남의 송아지를 끌어냈다든가, 머슴이 주인의 벼를 퍼냈다든가, 이런 범행이 빈번하다. 들병이가 내방하면 그들 사이에는 암암리의 경쟁이 시작된다. 서로 들병이를 독점하기 위하여 가진 방법으로 그 환심을 매수한다. 데리고 가서 국수를 먹이고, 닭을 먹이고, 혹은 감자도 구워다 선사한다. 그러나 좀 현명하면 약간의 막걸리로 그 남편을 수의로 이용하여도 좋을 것이다. 들병이가 되려면 이런 자분의 추세를 민감으로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소리는 졸렬할지라도 이 수단만 능숙하다면 호구는 무난일 게다. 그리고 남편은 배후에서 안해를 물론 지휘 조종하며 간접적으로 주객을 연락하여야 된다. 안해는 근육으로 남편은 지혜로, 이렇게 공동 전선을 치고 생존경쟁에 처한다. 들병이는 술값으로 곡물도 받는다고 전술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곡물뿐만 아니라 간혹 가장 집물에까지 이를 경우도 없지 않다. 식기, 침구, 의복류- 생활상 필요품이면 구태여 흑백을 가리지 않는다. 들병이에게 철저히 열광되면 그들 부부 틈에 끼어 같이 표박하는 친구도 있다. 이별은 아깝고, 동거는 어렵고, 그런 이유로 결국 한 예찬자로서 추종하는 고행이었다. 이런 때에는 들병이의 남편도 이 연애지상주의자의 정성을 박대하지는 않는다. 의좋게 동행하며 심복같이 잔심부름이나 시켜먹고 한다. 이렇게 되면 누가 본남편인지 분간하기 어렵고 자칫하면 종말에 주객이 전도되는 상외의 사연도 없는 것이 아니다.

주석

들병이 술을 병에 담아 들고 다니며 파는 떠돌이 작부. 시골 마을을 유랑하며 술과 노래, 몸을 팔아 생계를 잇던 1930년대 빈민 여성층.

애급(埃及)의 집시 이집트의 집시. 정착하지 않고 떠도는 유랑민을 가리키며, 본문에서 들병이의 유랑성을 빗댄 표현.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당시 널리 불리던 유행가 '희망가(탕자 자탄가)'의 첫 구절. '나의 희망'은 이 노래를 가리킨다.

선채금(先綵金) 혼인 때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미리 보내는 돈, 곧 신붓값.

적수공권(赤手空拳) 맨손과 맨주먹.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빈손이라는 뜻.

권비백산(拳飛魄散) 주먹이 날고 넋이 흩어진다는 뜻으로, 주먹다짐이 오가는 아수라장을 이른 말.

유두분면(油頭粉面) 기름 바른 머리와 분 바른 얼굴. 곱게 화장하고 단장한 여인의 모습.

주재소(駐在所) 일제강점기 시골 마을에 두었던 경찰의 말단 파출소.

심상·해설

추수 끝난 가을 농촌의 술집, 등잔불 아래 술을 파는 아내와 그 곁을 맴도는 남편, 아이를 업고 눈보라 속 마을에서 마을로 떠도는 들병이 부부의 신산한 삶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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