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웅 지음
중앙M&B/2003년 12월/317쪽/15,000원
▣ 저 자 정규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중앙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공연윤리위원회 위원, 방송위원회 심의위원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휴게실의 문학』『오늘의 문학현장』『글동네 사람들』『추리소설의 세계』 등이 있고, 역서로는 『케네디 가의 여인들』『지하철 정거장에서』『애너벨 리』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나혜석(1896∼1948)은 우리 나라 여성 최초의 서양화가다. 그녀는 부유한 관료의 딸로 태어나 우리 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했으며 그림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글재주도 뛰어나 문단에서까지 폭넓게 활동하였다. 결혼 당시 남편에게 혼인 각서를 쓰게 하고 신혼여행길에 죽은 애인의 묘소를 찾는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연출도 서슴지 않던 그녀는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고 무정부주의 단체인 의혈단의 후견인이 되기도 했었지만 정작 그녀의 남편은 한국인이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촉망받는 외교관이었다. 나혜석의 삶은 1927년을 전후하여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남편 김우영과 함께 한 세계 여행길에서 한동안 남편과 떨어져 파리에 체류했던 그녀는 그 곳에서 최린을 만나 연애를 하게 되고, 결국 이 일이 화근이 되어 남편으로부터 이혼 당한다. 나혜석의 외도는 그때까지 그녀에게 열광하던 사람들마저도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이혼 이후 나혜석은 궁지로 몰린 자신을 스스로 변명하고자 1934년 「이혼 고백장」을 발표하고 자신을 유린한 최린에게 보상금을 요구하는 제소장을 냈지만 이 일로 인해 그녀의 삶은 더욱 비참해진다. 재기를 위한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따른 건 화마와 병마, 외로움이었고 자식들조차 마음대로 볼 수 없던 그녀는 1948년에 행려병자로 숨을 거둔다.
천재적인 예술가로서 나혜석의 현실적인 삶은 일단 김우영과의 이혼이 성립된 1930년 말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그때부터 마지막 글과 그림을 남긴 1938년까지는 공허한 투쟁의 세월이었고, 그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10년은 의미 없는 삶이었던 것이다. 8년에 걸친 투쟁의 세월은 나혜석에게 새로운 삶을 줄 수도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를 외면했다. 외면만 한 것이 아니라 질시하고 냉소했다. 가정(假定)을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지만, 만약 이혼 후 나혜석의 '투쟁'이 사회로부터 얼마간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면 나혜석의 삶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혜석의 예술가적 천재성을 지나가버린 옛 이야기로 돌려버렸고, 오히려 그 천재성 때문에 나혜석의 불륜은 구원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혜석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일로 '투쟁'의 방편을 삼으려 했으나 사람들은 눈길을 주지 않았으며 폄하(貶下)하기에 급급했다. 나혜석의 불륜이 선입감으로 작용한 탓이었다. 그러나 설혹 나혜석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하더라도 사생활의 어떤 한 부분 때문에 그녀의 모든 업적이 싸잡아 평가절하되는 데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나혜석이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화 가였다든가, 문학사에 길이 남을 문학작품들을 남겼다는 사실은 일단 제쳐놓기로 하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나혜석이 두 가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는 점이다. 하나는 일제의 사슬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키자는 정치적 의미의 독립운동이요, 다른 하나는 제도와 인습의 굴레에서 조선 여성을 해방시키자는 사회적 의미의 여성 독립운동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같은 업적은 그 후의 빛나는 예술활동 때문에 상당 부분 가려졌다.
▣ 차 례
프롤로그 - 운명을 예고한 결혼식
소녀의 꿈과 사랑
도쿄에서 생긴 일
짧은 사랑, 긴 이별
방황의 시작과 끝
'여자도 사람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행복했던 나날
안동 부영사의 아내
고뇌를 극복하는 기쁨
세계여행길에 오르다
파리의 유혹
파멸의 길목
어둠 속에 홀로 서서
재기의 몸부림
화실 속의 불상(佛像)
「이혼 고백장」의 파문
마지막 전시회
여승은 싫어!
떠돌이 삶
마지막 모습들
에필로그 - 우리들의 가슴속에 들어 있는 나혜석의 무덤
작가후기
중앙M&B/2003년 12월/317쪽/15,000원
▣ 저 자 정규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중앙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공연윤리위원회 위원, 방송위원회 심의위원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휴게실의 문학』『오늘의 문학현장』『글동네 사람들』『추리소설의 세계』 등이 있고, 역서로는 『케네디 가의 여인들』『지하철 정거장에서』『애너벨 리』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나혜석(1896∼1948)은 우리 나라 여성 최초의 서양화가다. 그녀는 부유한 관료의 딸로 태어나 우리 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했으며 그림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글재주도 뛰어나 문단에서까지 폭넓게 활동하였다. 결혼 당시 남편에게 혼인 각서를 쓰게 하고 신혼여행길에 죽은 애인의 묘소를 찾는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연출도 서슴지 않던 그녀는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고 무정부주의 단체인 의혈단의 후견인이 되기도 했었지만 정작 그녀의 남편은 한국인이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촉망받는 외교관이었다. 나혜석의 삶은 1927년을 전후하여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남편 김우영과 함께 한 세계 여행길에서 한동안 남편과 떨어져 파리에 체류했던 그녀는 그 곳에서 최린을 만나 연애를 하게 되고, 결국 이 일이 화근이 되어 남편으로부터 이혼 당한다. 나혜석의 외도는 그때까지 그녀에게 열광하던 사람들마저도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이혼 이후 나혜석은 궁지로 몰린 자신을 스스로 변명하고자 1934년 「이혼 고백장」을 발표하고 자신을 유린한 최린에게 보상금을 요구하는 제소장을 냈지만 이 일로 인해 그녀의 삶은 더욱 비참해진다. 재기를 위한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따른 건 화마와 병마, 외로움이었고 자식들조차 마음대로 볼 수 없던 그녀는 1948년에 행려병자로 숨을 거둔다.
천재적인 예술가로서 나혜석의 현실적인 삶은 일단 김우영과의 이혼이 성립된 1930년 말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그때부터 마지막 글과 그림을 남긴 1938년까지는 공허한 투쟁의 세월이었고, 그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10년은 의미 없는 삶이었던 것이다. 8년에 걸친 투쟁의 세월은 나혜석에게 새로운 삶을 줄 수도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를 외면했다. 외면만 한 것이 아니라 질시하고 냉소했다. 가정(假定)을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지만, 만약 이혼 후 나혜석의 '투쟁'이 사회로부터 얼마간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면 나혜석의 삶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혜석의 예술가적 천재성을 지나가버린 옛 이야기로 돌려버렸고, 오히려 그 천재성 때문에 나혜석의 불륜은 구원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혜석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일로 '투쟁'의 방편을 삼으려 했으나 사람들은 눈길을 주지 않았으며 폄하(貶下)하기에 급급했다. 나혜석의 불륜이 선입감으로 작용한 탓이었다. 그러나 설혹 나혜석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하더라도 사생활의 어떤 한 부분 때문에 그녀의 모든 업적이 싸잡아 평가절하되는 데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나혜석이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화 가였다든가, 문학사에 길이 남을 문학작품들을 남겼다는 사실은 일단 제쳐놓기로 하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나혜석이 두 가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는 점이다. 하나는 일제의 사슬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키자는 정치적 의미의 독립운동이요, 다른 하나는 제도와 인습의 굴레에서 조선 여성을 해방시키자는 사회적 의미의 여성 독립운동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같은 업적은 그 후의 빛나는 예술활동 때문에 상당 부분 가려졌다.
▣ 차 례
프롤로그 - 운명을 예고한 결혼식
소녀의 꿈과 사랑
도쿄에서 생긴 일
짧은 사랑, 긴 이별
방황의 시작과 끝
'여자도 사람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행복했던 나날
안동 부영사의 아내
고뇌를 극복하는 기쁨
세계여행길에 오르다
파리의 유혹
파멸의 길목
어둠 속에 홀로 서서
재기의 몸부림
화실 속의 불상(佛像)
「이혼 고백장」의 파문
마지막 전시회
여승은 싫어!
떠돌이 삶
마지막 모습들
에필로그 - 우리들의 가슴속에 들어 있는 나혜석의 무덤
작가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