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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평전

정규웅 지음 | 중앙M&B
프롤로그 - 운명을 예고한 결혼식



1920년 4월 10일 오후 3시 서울 정동예배당에서는 한동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성대한 결혼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이 결혼식이 화제를 몰고 온 근본적인 이유는 그날의 주인공인 신부 나혜석(羅蕙錫)과 신랑 김우영(金雨英)을 둘러싼 여러 가지 뒷이야기들 때문이었다. 우선 그들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조선의 전통적인 명문가의 자제들이라는 점, 게다가 똑같이 일본에서 최고 교육을 받아 나혜석은 미술과 문학 분야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재원(才媛)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김우영은 교토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급 관료 진출을 눈앞에 둔 명망 있는 변호사라는 점이었다. 특히 나혜석이 스물다섯 살 미모의 재원인 데 비해 김우영은 신부보다도 나이가 열 살이나 위인 데다가 이미 사망한 전처와의 사이에 딸 하나까지 둔 처지라는 점도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는 대목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예술을 위해서라면 결혼은 포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나혜석으로서는 그날의 결혼식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다. 그리고 일생에 가장 의미 깊은 결혼식을 치르면서 미지의 결혼생활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신부가 품어서는 안 되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기에, 부정적인 생각들은 가급적 털어버리고 의도적으로 긍정적인 생각에만 몰두하면서 결혼식의 진행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혜석의 마음속에 은밀하게 감춰져 있던 갈등의 한 가닥은 결혼식이 끝난 뒤의 피로연 자리에서 은연중 튀어나왔다.

"… 그러나 저는 이런 형식에 얽매인 결혼식은 찬성하지 않습니다. 결혼이란 것은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인 두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결혼식을 어떻게 치르느냐에 따라 결혼 생활의 모양이 달라진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바에야 결혼식을 어 떻게 치르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의식(儀式)이나 케케 묵은 관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돌출적인 발언이기는 했지만 사실인즉 그것은 그녀가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아니 김우영과 결혼을 결심하고 난 이후 줄곧 품어왔던 갈등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김우영은 나혜석으로부터 결혼 승낙을 얻어내기까지 나혜석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일평생 사랑해줄 것'과 '결혼 생활이 자신의 예술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도록 해달라'는, 김우영으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거북한 요구도 두말 않고 승낙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최승구와의 애틋한 사랑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김우영은 결혼식을 끝낸 다음 함께 최승구의 묘소를 찾아가 성묘하고 비석까지 세워주겠다고 약속해 아직 사랑의 상처가 남아 있던 나혜석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신혼여행 삼아 신랑과 함께 묘소를 찾는 것으로 최승구에 대한 모든 생각을 지워버리기에는 나혜석의 마음속 깊이 차지하고 있는 최승구의 자리가 너무나도 굳건했기 때문에 이는 결혼 생활 10년 동안 내내 나혜석을 짓누르는 고통이었다.

결론적으로 김우영과 나혜석의 결혼은 시초부터 불행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잉태하고 있었다.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일찍 깨닫고도' 결혼을 감행했다면 그것은 나혜석의 잘못일 수밖에 없지만 결혼을 전후한 여러 가지 정황이 그녀로 하여금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었다면 근원적인 잘못은 어디에다 물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오직 나혜석 한 사람의 탓만은 아니었다. 폐쇄적인 가부장적 유교 이념이 여성만의 순종적인 삶을 강요하던 시대였고, 나혜석의 사상은 그런 낡고 케케묵은 시대정신을 외면하고 부정했던 데서 일찍부터 불행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짧은 사랑, 긴 이별



혜석이 도쿄에 유학한 지 꼭 1년이 되는 1914년 4월, 혜석은 30여 명에 이르는 조선 유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돋보이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무렵 혜석의 재능은 그림에서보다 글에서 먼저 표출되고 있었다. 그 활동 무대를 제공한 것이 재일본 조선학생학우회의 기관지인 「학지광」이었다. 당시 「학지광」은 동인지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혜석은 오빠 경석을 따라 그 편집실에 드나들면서 학구적이며 예술적인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었고, 「학지광」의 편집인을 맡고 있던 소월 최승구와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을 발표한 1914년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소월은 자기가 도쿄에 유학하기 전 고향에서 마음에도 없는 결혼식을 올려 아내가 있다는 사실과 이혼을 생각 중이며, 그것이 실행되는 대로 혜석과 결혼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혜석도 동의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오히려 혜석은 만약 소월의 이혼이 여의치 않다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에 가서 둘이서만 살아도 무방하다는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장애가 나타났다. 혜석의 아버지가 혜석의 귀국을 강력하게 명령한 것이었다.

혜석은 소월의 지병인 폐결핵이 점점 심해간다는 사실을 걱정하며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이 도쿄 유학 2년 만에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혜석을 맞는 아버지의 태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완강했다. 그 무렵의 일을 혜석은 1918년 9월 「여자계」잡지 2호에 실린 그녀의 소설 「경희」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 아버지가 "계집애라는 것은 시집가서 아들딸 잘 낳고 시부모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면 그만이니라." 하실 때에 "그것은 옛날 말이에요. 지금은 계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람인 이상에는 못할 것이 없다고 해요. 사내와 같이 돈도 벌 수 있고, 사내와 같이 벼슬도 할 수 있어요. 사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세상이에요." 하던 생각을 하며….

혜석에게는 아버지와 그런 승강이를 하며 살아야 하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최승구와 하루가 멀다 하고 주고받는 편지가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최승구로부터의 소식이 끊기자 혜석은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어 도쿄로 건너갔다. 최승구의 병세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돼 있었다. 혜석은 당장 그날부터 그의 병간호에 매달렸다. 그러나 혜석의 온갖 정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세는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혜석의 아버지 나기정이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혜석은 발길이 떨어지지 않지만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혜석이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다시 도쿄로 돌아왔을 때 최승구는 공기 맑은 곳으로 가서 요양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고 이미 귀국한 다음이었다. 길이 어긋난 것이었다. 혜석은 애가 탔다. 그래서 오빠에게는 귀국해서 편지로 알릴 요량을 하고 고흥을 향해 도쿄를 떠났다. 그것은 1916년 4월의 일이었다. 일부 자료에는 최승구의 사망 날짜가 그해 4월 24일로 되어 있지만 이런저런 자료들을 종합하면, 나혜석은 최승구가 운명하기 하루 전, 즉 4월 23일 도쿄로 떠났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 그녀가 최승구의 곁에서 며칠을 머물렀는지는 어느 곳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어쨌거나 최승구는 스물네 해의 짧은 삶을 마감했고, 혜석은 폐인이 돼가고 있었다.

경석은 그런 누이동생이 측은해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경석은 귀국 준비를 서두르면서 혜석에게 함께 귀국할 것을 종용했다. 그리고 누이동생 혜석을 위해 하나의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얻은 치명적인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경석에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교토(京都) 제국대학 정경학부 법률과를 다니고 있던 김우영이었다. 당시 교토 '조선유학생 친목회'의 간사를 맡고 있던 김우영은 경석보다는 나이가 네 살이 위인 서른 살이었으나 경석과는 친구처럼 지냈다.

1916년 7월 말쯤이었다. 어느 날 오후 경석은 신사복 차림의 웬 낯선 남자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김우영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우영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혜석은 말 대신 고개만 숙였다가 낯선 남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외관상으로는 별로 흠잡을 데가 없었으나 혜석은 그의 첫인상에서 부드럽기보다는 약간 차갑다는 느낌을 받았다. 혜석의 약간은 비판적인 이런 감정에 비해 김우영은 혜석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감정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그녀에게 매료되고 있었다. 김우영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혜석에게 접근했으나 혜석은 의도적으로 그를 피하고 무관심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김우영의 매사에 적극적인 성품이 혜석에게 불같은 열정으로 다가서며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최승구가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반년이 넘어서고 있었으나 혜석의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최승구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 혜석의 마음에 새로운 갈등으로 자라기 시작한 것은 김우영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척도였다. 자신에 대한 김우영의 사랑은 의심할 바가 없었으나, 과연 그 사랑의 정체는 무엇이냐 하는 데 대한 회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우영이 접근해올 때마다 혜석이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끌려간 것은 그녀 특유의 외로움 탓이었다. 혜석의 입장에서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래서 김우영이 결혼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혜석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김우영이 자기와 결혼하겠다는 것은 자기를 일평생 '소유물'로 삼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도 사람이다



김우영의 사랑을 어떻게 해석했든 간에 김우영과의 만남이 횟수를 더해가면서 혜석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해가 바뀌면서 혜석은 그동안 해이해졌던 마음을 추슬러 밀렸던 공부에 매달리는 한편 1년 가까이 손을 놓았던 그림도 그리고 글도 썼다. 그 무렵 혜석의 관심은 여성의식의 개혁에 관한 문제로 쏠리고 있었다. 혜석은 '잡감 - K언니에게 여(與)함'이라는 글에서 "인격존중이니, 사람은 사람답게 이상(理想)의 반푼이라도 실현해야겠고, 또 사람다운 생활을 해야겠다."는 것을 바라볼 욕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조선 여성이 가져야 할 '세 가지 욕심'을 제시했다. 첫째는 '사람 될 욕심'이요, 둘째는 '자기 소유를 만들려는 욕심'이요, 셋째는 '활동할 욕심'이라는 것이다. 덧붙여 "내가 여자요, 여자가 무엇인지 알아야겠소. 내가 조선 사람이요, 조선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알아야겠소."라는 말로 조선 사람, 특히 조선 여성의 의식 개혁을 외쳤다.

이 글을 발표한 후 혜석은 좀더 현실적이며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안 가운데 하나로 떠오른 것이 도쿄의 조선여자유학생 친목회였다. 조선여자유학생 친목회는 1917년 7월 이 단체의 기관지이자 여성 잡지인 「여자계」를 창간했다. 혜석은 「여자계」 창간호에 첫 소설을 발표한 뒤 재정의 어려움으로 속간이 불투명했던 「여자계」의 속간을 위해 전영택과 함께 모금운동을 벌였다. 그런 적극성을 보여 혜석은 그해 10월 17일 도쿄의 조선인 교회에서 열린 조선여자유학생 친목회 임시총회에서 총무로 선출되고 동시에 허영숙, 황애시덕(黃愛施德)과 함께 「여자계」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기에 이르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여름 방학의 며칠을 오빠 집에서 보낸 혜석은 다시 도쿄로 돌아와 교토를 오가며 졸업작품을 완성했다. 혜석은 졸업 후에도 도쿄에 머물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싶었으나 그럴 명분이 없었고,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물론 혜석보다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김우영은 도울 것을 자청하면서 혜석이 그대로 도쿄에 머물 것을 종용했으나 그것은 혜석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러나 김우영은 혜석과 헤어지기 싫었다. 그렇다고 그저 졸업장만 하나 달랑 들고 귀국하는 혜석을 따라 함께 귀국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1918년 3월 혜석은 도쿄 여자미술학교를, 다음 달인 4월 김우영은 쿄토 제대법학부를 각각 졸업했다. 김우영의 졸업을 보고 곧바로 귀국한 혜석은 모교인 진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고국에서의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어느덧 해가 바뀌었다. 1919년 기미년 독립운동이 벌어진 해다. 새해 1월 21일부터 2월 7일 사이에 혜석은 「매일신보」에 '섣달 대목'이라는 제목으로 4회, '초하룻날'이라는 제목으로 5회 등 모두 9점의 만평을 연재했다. 조국에서의 첫 미술 활동인 셈이었다. 이 그림들을 여성의 시각으로 그린 연말연시의 세시풍속이라는 점에서 최초의 페미니스트 만평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그림에 곁들인 문장도 일품이었다. 만평을 발표하고 나서 며칠 뒤 혜석은 도쿄에서 조선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독립운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이른바 '2·8 독립선언'이었다. 물론 조선여자유학생 친목회도 이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는 소식이었다. 혜석은 그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일찍 귀국한 것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혜석이 그대로 도쿄에 있었다면 그녀 역시 주동자 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혜석은 3월 1일 정오를 기해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민족 대표들에 의해 낭독 발표될 예정이었던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입수할 수 있었다. 당시 진명여학교 3학년이던 이정희(李正熙)는 선배 나혜석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입수해서 교내에 배포했다. 3월 2일 진명여학교 학생들이 이화학당, 정신여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독립 만세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 수 있었던 것은 나혜석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한편 2·8 독립선언에 주동적으로 참여했던 조선여자유학생 친목회의 김마리아 회장과 혜석과 함께 「여자계」의 편집위원을 맡았던 황애시덕은 그 직후 일본 경시청에 체포되었다가 다행스럽게 곧 풀려났다. 이들은 국내에서 보다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2월 21일 귀국했다. 3월 1일 전국적인 독립운동이 활화산처럼 터진 그 다음날 김마리아와 황애시덕은 정동교회에서 나혜석을 만났다. 세 사람은 2·8독립선언과 일본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국내에서 전개할 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나 박인덕, 김마리아, 나혜석 등의 독립운동 모의는 첫 모임이 있은 지 불과 엿새 만인 8일, 열한 명 전원이 일본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된다. 어찌 보면 단순히 독립운동에 관한 의견을 나눈 데 불과한 이 사건은 그러나 법원의 최종 판결까지 5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소요됐다. 3·1 독립운동 이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애국지사와 학생들이 투옥됐지만 혜석 역시 열 명의 동지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 가까이 옥고(獄苦)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김우영은 그 판결이 있은 직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혜석이 면소 판결을 받고 석방됐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던 김우영은 합격 통지를 받자마자 급히 귀국했다.

10년에 걸친 일본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변호사가 되어 귀국한 김우영이 조국에 돌아와 처음 한 일은 혜석과의 약속대로 독립운동을 변호하는 일이었다. 꼭 김우영의 권고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혜석은 정신여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현실 문제에 대한 참여를 가급적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그동안 건강이 여의치 않았던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소 안정을 되찾아가던 혜석에게 어머니의 별세는 충격적이었다. 다시 흔들리려는 마음을 되잡아준 사람이 김우영이었다. 혜석의 심적 변화에 용기를 얻은 김우영은 한동안 말조차 꺼내지 못했던 결혼 이야기를 다시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혜석은 생각했다.

'이 사람과 결혼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세 가지 조건을 떠올렸다. 첫째, 일생을 두고 지금처럼 나를 사랑해줄 것. 둘째, 어떤 경우에도 그림 그리는 데 방해가 되지 말 것. 셋째,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을 것. 지금 이 사람은 그 세 가지를 모두 약속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더 남아 있다. 최승구 씨를 마음속에서 지워버리는 일이다. 그 문제 역시 이 사람이 도와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문제도 지금 이야기해버릴까?' 혜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김우영은 뭔가 미심쩍어하면서도 결혼 승낙을 얻은 것만이 너무나도 기뻐 혜석을 다시 한번 힘차게 포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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