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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평전

정규웅 지음 | 중앙M&B
동래 집을 나온 혜석은 앞길이 막막했다. 자식 넷과 함께 죽을 작정이었으나 지금은 그것도 불가능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자기 혼자 죽는 것뿐이었다. '나 혼자서 죽을 힘은 남아 있나? 살 힘이 남아 있다면? 그렇다. 없는 길을 찾는 것이 내 힘이요, 없는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내 힘이다! 그래. 나의 마지막 희망은 역시 그림이다. '제전(帝展)'에 도전해보자.'



김우영은 혜석과의 이혼이 마무리되고, 혜석이 동래 집을 떠나던 무렵 조선총독부로부터 집요한 공세를 받고 있었다. 관직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세계여행을 다녀온 뒤 조선총독부의 사무관으로 일하라는 외무성의 제의도 완강하게 거절했던 그였다. 그것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민족적 양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욕을 가지고 다시 시작했던 변호사 일은 경제적으로 그에게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빚만 늘어가는 형편이었다. 혜석은 계속해서 재산 분할을 요구해왔고, 동래 본가에서는 생활비를 내려보내라고 시시각각 압박해 오고 있었다. 신정숙을 새 아내로 맞아들이고 아이들까지 올라오게 하니 돈 들어갈 곳은 더욱 많았다. 도무지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김우영에게는 더 이상 버텨낼 힘이 없었다. 그는 결국 총독부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전라남도 이사관직을 받아들여 가솔을 이끌고 임지인 광주로 부임한 것은 혜석이 금강산에서 그림에 몰두하던 1931년 봄이었다.



혜석은 10월에 열릴 제12회 '제전'에 금강산에서 그린 <금강산 삼선암>과 지난 봄의 조선미전에서 특선을 차지했던 <정원> 등 두 점을 출품했다. 혜석의 의도대로 <정원>은 제12회 '제전'에서 입선되는 행운을 안았다. 그것은 혜석의 의욕을 불타오르게 했으나 이제 겨우 산의 중턱에서 정상에 오르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무엇보다 그녀를 바라보는 사회의 눈은 여전히 차가웠고, 그러한 비뚤어진 시각은 그녀의 작품을 보는 눈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붉은 안경을 쓰고 보면 모든 것이 붉게 보이는 격이라고나 할까.건강을 되찾고자 하는 혜석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으나 건강은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파리로 떠난다는 계획은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수원에 집 한 채를 마련하여 머무르면서 쾌적한 환경에다 약도 열심히 먹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 혜석의 건강도 차츰 나아지기 시작했다.



혜석은 한동안 놓았던 붓을 다시 들었다. 쓰려고 생각했던 소재의 글들도 썼다. 그림도 열심히 그렸다. 수원에 이사와서 약 6개월간 그린 그림이 무려 2백여 점에 달했다. 그 무렵 광주로 내려가 전라남도 과장으로 일하고 있던 김우영이 새 아내 신정숙에게서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혜석은 아이들이 보고 싶어 눈물이 핑 돌았다. 떳떳하게 아이들을 만나보려면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가 건재해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혜석은 그동안 그린 그림들을 모아 10월 24일 서울 진고개(지금의 충무로)에 있는 조선관(朝鮮館) 전시장에서 '근작 소품전'을 열었다. 혜석으로서는 세 번째 개인 전람회였다. 이 전시회는 2주 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혜석에게 재기의 발판이 됐을지도 모를 이 전시회는 실패였다. 그러나 혜석의 재기 의지를 완전히 꺾어놓은 그 전람회가 열리고 있던 중 또 하나의 비극이 발생한 사실을 혜석은 전시회가 끝난 후에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광주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던 큰아들 선이 폐렴으로 앓다가 세상을 뜬 것이었다. 혜석은 전람회의 실패에 이은 큰아들의 죽음으로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파리로 떠나겠다는 계획도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그림이 전혀 팔리지 않은 전시회에 너무 많은 돈을 들였을 뿐만 아니라 수입이라고는 원고료 몇 푼이 고작이어서 1년 가까이 생활비로도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1937년이 저물어가면서 혜석은 경제적으로 더 이상 지탱할 힘이 없었다. 최린에게서 받은 합의금은 수원 집을 제외하면 바닥이 난 지 이미 오래였고, 이따금 한 편씩 쓰는 글의 원고료는 생활에 거의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저 푼돈일 따름이었다. 수원 집을 처분하는 것만이 돈을 만들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그 마지막 방법을 택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보다도 혜석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남의 신세를 지거나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혜석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툭하면 대전에 가서 먼발치로나마 아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학교 근처에 숨어 아이들이 교문 밖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 혼자 눈물짓곤 했는데 어느 날부턴가 학교에서 아들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웃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김우영이 또 승진해서 서울로 올라갔다는 것이었다. 혜석은 곧 서울로 올라갔다. 김우영의 집은 새로 지은 양옥이었다. 집에는 들어갈 생각을 못하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저녁시간까지 기다리다가 세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 자리를 떠났다. 혜석은 그 길로 또 청운동 오빠 집으로 갔다. 올케 숙경은 난감해하면서도 혜석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올케는 늘 그랬던 것처럼 혜석을 목욕시키고 속옷을 갈아입혔다. 혜석은 조카들에게서 딸 나열이 개성 사람에게 시집가서 그곳에서 학교 선생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열은 한동안 연락을 끊고 있었는데 그것은 혜석이 찾아와 자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혜석은 나이 쉰을 바라보면서 모든 사람이 귀찮아하고 짐스러워하는 폐인이 돼가고 있었다. 경석과 숙경 내외는 심사숙고 끝에 혜석을 양로원에 집어넣기로 결정했다. 혜석은 청운양로원에서 해방을 맞았다. 일제의 쇠사슬로부터 36년 만에 풀려난 1945년 8월 15일은 조선 민족 모두에게 뜻 깊은 날이었으나 일제 치하에서 승승장구하던 사람들에게는 악몽 같은 날이었다. 바로 김우영과 최린 같은 사람들이었으므로 해방은 혜석에게는 더욱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혜석은 그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만큼 황폐해 있었다.



"수, 숨이 막혀요. 여, 여기 더 있다가는 주, 죽을 것 같아요. 제, 제발! 마, 마지막 소원이예요." 청운양로원 외에도 안양에 경성보육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윤영 원장은 혜석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었다. 경성보육원으로 거처를 옮긴 혜석은 최후의 남은 기력을 글 쓰는 일에 쏟아 부었다. 그해 가을 경성보육원을 나온 혜석은 갈 곳이 있을 리 없었다.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게 된 혜석은 또다시 오빠의 집을 찾아갔다. 이제 죽음만을 눈앞에 두게 된 혜석을 오빠네 식구들은 환대도 냉대도 하지 않았다. 혜석은 하루 종일 구석방에 틀어박혀 경성보육원에서 쓰던 글을 계속 썼으나 아무도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오빠의 집을 떠난 혜석은 1948년 12월 10일 서울 원효로에 있던 시립 자제원(慈濟院)에서 행려병자로 숨을 거두기까지 어떤 사람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1920년 4월 10일 오후 3시 서울 정동예배당에서는 한동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성대한 결혼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이 결혼식이 화제를 몰고 온 근본적인 이유는 그날의 주인공인 신부 나혜석(羅蕙錫)과 신랑 김우영(金雨英)을 둘러싼 여러 가지 뒷이야기들 때문이었다. 우선 그들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조선의 전통적인 명문가의 자제들이라는 점, 게다가 똑같이 일본에서 최고 교육을 받아 나혜석은 미술과 문학 분야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재원(才媛)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김우영은 교토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급 관료 진출을 눈앞에 둔 명망 있는 변호사라는 점이었다. 특히 나혜석이 스물다섯 살 미모의 재원인 데 비해 김우영은 신부보다도 나이가 열 살이나 위인 데다가 이미 사망한 전처와의 사이에 딸 하나까지 둔 처지라는 점도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는 대목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예술을 위해서라면 결혼은 포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나혜석으로서는 그날의 결혼식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다. 그리고 일생에 가장 의미 깊은 결혼식을 치르면서 미지의 결혼생활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신부가 품어서는 안 되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기에, 부정적인 생각들은 가급적 털어버리고 의도적으로 긍정적인 생각에만 몰두하면서 결혼식의 진행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혜석의 마음속에 은밀하게 감춰져 있던 갈등의 한 가닥은 결혼식이 끝난 뒤의 피로연 자리에서 은연중 튀어나왔다."… 그러나 저는 이런 형식에 얽매인 결혼식은 찬성하지 않습니다. 결혼이란 것은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인 두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결혼식을 어떻게 치르느냐에 따라 결혼 생활의 모양이 달라진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바에야 결혼식을 어 떻게 치르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의식(儀式)이나 케케 묵은 관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돌출적인 발언이기는 했지만 사실인즉 그것은 그녀가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아니 김우영과 결혼을 결심하고 난 이후 줄곧 품어왔던 갈등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김우영은 나혜석으로부터 결혼 승낙을 얻어내기까지 나혜석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일평생 사랑해줄 것'과 '결혼 생활이 자신의 예술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도록 해달라'는, 김우영으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거북한 요구도 두말 않고 승낙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최승구와의 애틋한 사랑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김우영은 결혼식을 끝낸 다음 함께 최승구의 묘소를 찾아가 성묘하고 비석까지 세워주겠다고 약속해 아직 사랑의 상처가 남아 있던 나혜석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신혼여행 삼아 신랑과 함께 묘소를 찾는 것으로 최승구에 대한 모든 생각을 지워버리기에는 나혜석의 마음속 깊이 차지하고 있는 최승구의 자리가 너무나도 굳건했기 때문에 이는 결혼 생활 10년 동안 내내 나혜석을 짓누르는 고통이었다.



결론적으로 김우영과 나혜석의 결혼은 시초부터 불행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잉태하고 있었다.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일찍 깨닫고도' 결혼을 감행했다면 그것은 나혜석의 잘못일 수밖에 없지만 결혼을 전후한 여러 가지 정황이 그녀로 하여금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었다면 근원적인 잘못은 어디에다 물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오직 나혜석 한 사람의 탓만은 아니었다. 폐쇄적인 가부장적 유교 이념이 여성만의 순종적인 삶을 강요하던 시대였고, 나혜석의 사상은 그런 낡고 케케묵은 시대정신을 외면하고 부정했던 데서 일찍부터 불행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혜석이 도쿄에 유학한 지 꼭 1년이 되는 1914년 4월, 혜석은 30여 명에 이르는 조선 유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돋보이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무렵 혜석의 재능은 그림에서보다 글에서 먼저 표출되고 있었다. 그 활동 무대를 제공한 것이 재일본 조선학생학우회의 기관지인 「학지광」이었다. 당시 「학지광」은 동인지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혜석은 오빠 경석을 따라 그 편집실에 드나들면서 학구적이며 예술적인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었고, 「학지광」의 편집인을 맡고 있던 소월 최승구와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을 발표한 1914년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소월은 자기가 도쿄에 유학하기 전 고향에서 마음에도 없는 결혼식을 올려 아내가 있다는 사실과 이혼을 생각 중이며, 그것이 실행되는 대로 혜석과 결혼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혜석도 동의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오히려 혜석은 만약 소월의 이혼이 여의치 않다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에 가서 둘이서만 살아도 무방하다는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장애가 나타났다. 혜석의 아버지가 혜석의 귀국을 강력하게 명령한 것이었다.



혜석은 소월의 지병인 폐결핵이 점점 심해간다는 사실을 걱정하며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이 도쿄 유학 2년 만에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혜석을 맞는 아버지의 태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완강했다. 그 무렵의 일을 혜석은 1918년 9월 「여자계」잡지 2호에 실린 그녀의 소설 「경희」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김우영은 혜석을 꼭 껴안으며 귓속말로 말했다. "그래, 그래. 우리 가도록 합시다."파리의 유혹파멸의 길목記 파리에서 우리 조선 사람은 더러 만났습니까? 羅 … 최 선생도 거기에서 만났었습니다. 아마 근래 우리 조선 사람으로서 외국에 유람 중에 내외국인에 큰 대우를 받으신 이는 그만한 이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나도 퍽 흠선(欽 羨)하였습니다.혜석에게는 아버지와 그런 승강이를 하며 살아야 하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최승구와 하루가 멀다 하고 주고받는 편지가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최승구로부터의 소식이 끊기자 혜석은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어 도쿄로 건너갔다. 최승구의 병세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돼 있었다. 혜석은 당장 그날부터 그의 병간호에 매달렸다. 그러나 혜석의 온갖 정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세는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혜석의 아버지 나기정이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혜석은 발길이 떨어지지 않지만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혜석이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다시 도쿄로 돌아왔을 때 최승구는 공기 맑은 곳으로 가서 요양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고 이미 귀국한 다음이었다. 길이 어긋난 것이었다. 혜석은 애가 탔다. 그래서 오빠에게는 귀국해서 편지로 알릴 요량을 하고 고흥을 향해 도쿄를 떠났다. 그것은 1916년 4월의 일이었다. 일부 자료에는 최승구의 사망 날짜가 그해 4월 24일로 되어 있지만 이런저런 자료들을 종합하면, 나혜석은 최승구가 운명하기 하루 전, 즉 4월 23일 도쿄로 떠났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 그녀가 최승구의 곁에서 며칠을 머물렀는지는 어느 곳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어쨌거나 최승구는 스물네 해의 짧은 삶을 마감했고, 혜석은 폐인이 돼가고 있었다.



경석은 그런 누이동생이 측은해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경석은 귀국 준비를 서두르면서 혜석에게 함께 귀국할 것을 종용했다. 그리고 누이동생 혜석을 위해 하나의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얻은 치명적인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경석에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교토(京都) 제국대학 정경학부 법률과를 다니고 있던 김우영이었다. 당시 교토 '조선유학생 친목회'의 간사를 맡고 있던 김우영은 경석보다는 나이가 네 살이 위인 서른 살이었으나 경석과는 친구처럼 지냈다.



1916년 7월 말쯤이었다. 어느 날 오후 경석은 신사복 차림의 웬 낯선 남자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김우영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우영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혜석은 말 대신 고개만 숙였다가 낯선 남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외관상으로는 별로 흠잡을 데가 없었으나 혜석은 그의 첫인상에서 부드럽기보다는 약간 차갑다는 느낌을 받았다. 혜석의 약간은 비판적인 이런 감정에 비해 김우영은 혜석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감정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그녀에게 매료되고 있었다. 김우영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혜석에게 접근했으나 혜석은 의도적으로 그를 피하고 무관심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김우영의 매사에 적극적인 성품이 혜석에게 불같은 열정으로 다가서며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최승구가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반년이 넘어서고 있었으나 혜석의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최승구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 혜석의 마음에 새로운 갈등으로 자라기 시작한 것은 김우영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척도였다. 자신에 대한 김우영의 사랑은 의심할 바가 없었으나, 과연 그 사랑의 정체는 무엇이냐 하는 데 대한 회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우영이 접근해올 때마다 혜석이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끌려간 것은 그녀 특유의 외로움 탓이었다. 혜석의 입장에서 그것은 진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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