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궁예

슬픈 궁예

저자: 이재범
출판사: 푸른역사
등록일: 2000-09-25
왕건에게 왕위를 빼앗긴 포악한 애꾸눈 왕 궁예. 보리이삭을 훔쳐먹다 농민들에게 몰매 맞아 죽었다는 비참한 최후도 그의 포악성을 강조할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을 품는다. 과연 이 모든 것이 사실일까? 이같은 사실들이 고려 태조 왕건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왜곡되거나 과장되지는 않았을까?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의문에 대한 저자의 충실한 답변이다.



▣ 언론 속에 비친 《슬픈 궁예》

'애꾸눈 아저씨' 궁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담았다.역사학자인 저자는 궁예를 3년만에 홀로서서 건국한 지장이자,백두대간을 양쪽으로 아우르는 국토개척자로 파악한다.일본으로 치면지략의 명수라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은 인물이라는 평가다. (푸른역사·8000원). - 《국민일보》(2000년 9월 4일자)

애꾸 눈에 거친 모습, 광포하고 괴팍한 성격. 보통 사람들의 머리에 각인된 궁예의 이미지다. '삼국사기' '고려사' 등 관련 역사서 역시 궁예를 악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역사의 대부분이 승자의 기록이었다는 점을 돌이켜볼 때, 패자인 궁예 역시 승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대목은 없을까.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궁예에 드리워진 편견을 걷어내고 그 실체에 객관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저자는 궁예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경기대 교수(한국사).



우선 궁예의 난폭한 성격에 관한 부분. 궁예는 의심을 일삼았고 부인 강씨와 두 아들을 죽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광폭함이 궁예 성격의 전부인 듯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말년의 성격일 뿐, 이것만으로 궁예를 파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가들은 또한 이를 두고 궁예가 신라왕(헌안왕 혹은 경문왕)의 서자로 태어나 왕실에서 버림받은 충격, 그 정신분열의 결과로 이해해왔다. 저자는 이것이 잘못된 시각이라고 단언한다. 실제로 궁예가 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확실치 않다고 덧붙인다.



잦은 국호 연호 변경에 관한 문제. 궁예는 불과 십수년 사이에 국호를 고려 마진 태봉으로, 연호를 무태 성책 수덕만세 정개로 바꿨다. 이를 놓고 후대는 궁예를 광인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의 출생에서 비롯된 정신불안의 결과라고 말해왔다. 저자는 그러나 국호의 변경은 시의적절하고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첫 국호를 고려로 정한 것은 초기 점령지역이 고구려의 옛땅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결과였다. 이후 신라 백제 지역을 영토로 편입시키면서 고구려 중심의 국호를 바꿔야 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를 모두 포함하는 마진(대동방국이란 뜻)으로 바꾼 것은 그래서 옳은 선택이었다.



… 정사(正史)와 전설이 왜 이렇게 다를까. 이 대목에 이 책의 핵심 메시지가 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낸 것은 분명 역모였다. 궁예가 고구려 중심주의를 포기하자 불안을 느낀 왕건과 고구려계 세력이 역모를 꾸민 것이다. 그렇기에 그 역모는 명분이 약했다. 그래서 반란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궁예의 포악함을 지나치게 부각시켰을 수 있다. 이럴 경우, 정사는 왜곡될 가능성이 높다."

- 이광표 기자·《동아일보》(2000년 8월 26일자)

김영철형께

… 혹시 형께서도 최근 이재범 교수가 소설과 역사의 경계 사이에서 펴낸 《슬픈 궁예》(푸른역사)를 읽어보셨는지요. 그는 이 땅에 몇 안 되는 궁예 연구의 권위자입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그려진 궁예는 그가 하급 승려 출신으로서 호족간의 세력 싸움 속에서 큰 피를 흘리지 않고 중부권의 가장 막강한 실력자로, 한 나라의 제왕이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악의 화신이자 폭군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왕건의 등극 역시 쿠데타나 권력 투쟁으로서가 아닌 궁예에 대한 도덕적 승리인 것처럼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승자의 기록인 것인데,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현대사에서도 국민의 피까지 흘리는 쿠데타로 집권하고서도 자신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부르게 하고 또 스스로 그렇게 기록되길 바라던 독재자가 있었잖습니까?



이재범 교수의 《슬픈 궁예》는 무조건 궁예 편들기가 아니라 역사 속의 패자인 그에게 승자가 덧씌운 악과 광기의 굴레를 벗겨내고 한 인간으로서 그가 어떤 지략과 통치자적 자질로 후삼국 중 가장 강한 고려의 왕이 되었으며, 이후엔 어떻게 몰락하게 되었는가 하는 배경을 말 그대로 소설과 역사의 경계에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는 인간 궁예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본 다음 전보다 더 주말 저녁의 「태조 왕건」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지켜보는 재미와 함께 승자의 기록으로서 역사와 그것을 재현해내는 드라마 사이의 경계는 어떤 것인지 그것을 지켜보는 재미 또한 여간 크지 않은 것이지요. - 이순원(소설가)·《조선일보》(2000년 9월 23일자)

이재범(49) 경기대 교수는 궁예에 관해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15년 궁예을 연구했고, 지난 92년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도 《후삼국시대 궁예정권의 연구》다. 그는 왜 이토록 궁예에 몰두하는가? "도덕주의 혹은 성패론에 따라 역사의 인물들을 재단하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립했을지언정 한 시대를 고민했던 동반자로서 그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상 보기 드물게 나쁜 놈'으로 돼있는 궁예 연구는 그런 면에서 제격입니다."



이 교수는 서문에서도 한 서양학자의 한국역사관 평가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당시 논문을 읽고 조롱당한 것 같았다"고 했다. 논문은 '좋은 놈, 나쁜 놈, 치사한 놈'이란 제목으로 각각 왕건, 견훤, 궁예를 비유해 놓고는, 그러한 은유가 권선징악적 편견에 사로잡힌 한국의 전통적 역사관이라고 비꼰다.



이런 생각들을 밑에 두었으니, 《슬픈 궁예》는 물론 궁예에 관한 기존의 평가를 뒤집는다. '포학한 궁예'를 다각도로 한꺼풀 벗겨내고, 궁예에게서 거란에 보검을 하사하는 등 동아시아 패자를 자부했던 모습을 본다. 또 골품제를 부인하고 능력 위주의 관인체제를 구축하려던 혁명을 본다. 그리고는 "궁예는 왕건의 용의주도한 반란에 의해 몰락했다, 포학함이 아니라 고구려계 호족들의 결탁에 의한 반역으로 왕좌에서 물러났다"고 잘라 말한다.



이 교수는 책 말미에 "과거는 불변이지만, 역사는 바뀐다"고 썼다. "바뀌어가는 역사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부탁한다"고 했다. - 이지형 기자·《조선일보》(2000년 9월 2일자)

요즘 텔레비전 사극으로 한창 뜨고 있는 '애꾸눈 제왕' 궁예(?~918)만큼 우리 역사에서 다기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이 있을까. 안개에 싸인 출생배경만큼이나 인물 자체에 대한 후대의 해석도 극명하게 갈라진다. 이는 《삼국사기》·《고려사》 같은 전통 사서들이 궁예를 부인과 아들을 죽인 폭군으로 비난한 반면 민간전설들은 오히려 미륵불 같은 선인으로 묘사하는 데서 비롯된다.



더욱이 궁예 관련 유적들은 현재 휴전선 비무장지대인 철원에 흩어져 그의 재평가는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고려태조 왕건에 밀려 역사 저편에 사라진 이 비운의 인물은 그저 영원한 수수께끼 속에 파묻혀야할 운명일까.



몇 안 되는 궁예 연구자인 이재범 경기대 교수의 《슬픈 궁예》(푸른역사)는 유교사관에서 덧씌운 악인의 굴레를 벗기고 경세가로서 궁예를 파헤쳐본 책이다. 신라쇠망기를 틈타 각지의 호족들이 발흥한 후삼국시대를 어느 때보다 자주적 에너지가 꿈틀거린 약동기로 눈여겨본 지은이는 정치정세와 지역적 역학관계를 토대로 풍운아 궁예의 생애를 색다르게 복원한다.



궁예의 성장사와 권력 획득 과정에 대한 서술에서 이런 관점은 도드라진다. 이 교수는 하급승려 출신이던 궁예가 대권을 잡게된 것은 호족간의 영역싸움에서 다양한 전략전술을 구사한 지장으로서의 면모 때문이었다고 보고있다. 894년 피를 흘리지 않고 명주를 점령해 장군으로 추종받은 것이나 중부권 실력자 양길의 수하에서 급속히 세력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사사로움 없이 위아래를 대하는 통치자적 자질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게 이 교수의 견해다.



… 궁예는 쫓겨나 달아나던 중 밭에서 보리이삭을 훔쳐먹다 농민들에게 살해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지은이는 궁예가 천명이 다했음을 알고 선 채로 자결했다는 철원지역 전설을 바탕으로 그의 최후도 악인처럼 윤색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다분히 궁예를 미화하는 듯한 느낌도 주지만 선악개념이 아닌 기능주의적 사관으로 궁예, 왕건의 관계를 분석해 역사산책의 흥취를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책이다.

- 노형석 기자·《한겨레신문》(2000년 8월 28일자) … 사실 우리의 고정관념 속에서 궁예는 가장 나쁜 캐릭터입니다. 《삼국사기》·《고려사》에도 폭군으로 기록돼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가 진짜 몹쓸 인간이었다면 어떻게 한 나라를 일으키고 몇십년동안 강하게 키워냈을까요. 《슬픈 궁예》는 승리자인 왕건에 의해 드리워진 궁예의 그늘을 벗겨줍니다. 그의 '악행'도 후세에 편찬된 《삼국사기》·《고려사》에서 덧칠됐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고려도경》을 근거로 궁예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합니다. 짧은 기간에 장군이 된 저력에서는 개인적 능력을 높이 사기도 합니다. 철원 천도를 국토개척으로 평가하고 여러 번 바꾼 국호와 연호, 거란과의 외교 관계 등을 통해 자주적이고 원대한 꿈을 지닌 제왕으로 끌어올립니다.



그렇지만 궁예는 몰락했습니다. 저자는 그 원인을 왕건의 쿠데타로 봅니다. 쿠데타 직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환선길이 난을 일으키고 공주 이북 30여개 성이 후백제에 넘어갔는 사실을 통해 궁예 축출이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파워게임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궁예의 책임도 언급돼있습니다. 철원 천도 때 많은 백성을 무리하게 새 도읍으로 옮기려 했다든지 무거운 조세 징수 등이 반발과 이탈을 불러왔다는 거죠. 저자는 궁예가 그토록 총애했던 왕건에게 쫓겨나 비참하게 죽는 장면에서는 브루투스에게 살해된 줄리어스 시저를 떠올리고 있군요.



그래서 궁예는 더욱 슬픕니다. 학계나 출판계는 서점가의 후삼국 시대 붐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입니다. 일시적 유행에 편승한 상업주의에 우려를표시하는 시각도 있고 영웅 중심의 운명론으로 치닫는 것도 경계 대상입니다. 다만 천년 세월 저쪽의 승자와 패자를 재해석하는 힘이 지금 우리 삶에 어떤 성찰을 제공하는지,저마다 인생의 독법을 재음미하는 시간은 늘 소중하지요.

- 고두현·《한국경제신문》(2000년 8월 31일자)

… 궁예의 이미지는 아직 우리에게 '광인'으로 자리잡혀 있다. 집권 말기 교만에 빠져 자칭 '미륵불의 화신'으로 행세한 인물, 부인에게 간통죄를 뒤집어씌워 그녀 소생의 두 아들과 함께 죽인 나쁜 왕이 궁예이다. 지금까지 방송된 포용력과 이해심 많은 궁예의 모습은 이러한 극적인 반전을 노린 정교한 장치라는 느낌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경기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가 '궁예 다시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박사학위논문인 '후삼국시대 궁예정권의 연구'를 일반인을 위해서 각색했다. 빈약한 자료에 단순한 추측의 산물이 아닌, 학자적인 고증과 논리를 내세운 '궁예 사랑' 이다.



저자는 우선 과거 정사(正史)에서조차 궁예를 어떻게 포악하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제시한다. '고려사'의 기록이다. '궁예는 드디어 3척이나 되는 쇠방망이를 만들어놓고 그것을 달구어 여자의 음부를 찔러 연기가 입과 코로 나오게 해 죽였다'. 이번에는 '삼국사기'의 기록. '왕이 무쇠방망이를 열화에 달구어 그 음부를 쳐서 죽이고 두 아들까지 죽였다'. 하지만 저자는 이후 사가들의 선입견과 억측을 하나하나 반박해간다. … 저자의 '궁예 사랑'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 사랑' 에 못지 않은 것 같다.

- 김관명 기자·《한국일보》(2000년 9월 1일자)

▣ 저자 이재범

1951년 전남 곡성 출생.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후삼국시대 궁예정권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편수원. 국방군사연구소 민족군사부장을 거쳐 현재 경기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 <왜구토벌사> 등이 있고, 논문으로 '최씨정권의 성립과 산천비보도감' '고려 태조 즉위시의 사회적 동향에 관한 고찰'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에 대한 재검토' 등이 있다.



Short Summary

역사는 궁예를 왕건에게 왕위를 빼앗긴 포악한 애꾸눈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은 고려 태조의 왕건을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궁예에 대한 평가가 왜곡되거나 과장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된다. 궁예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위해 저자는 사료 해석부터 다시 한다.



궁예의 성장사와 권력 획득 과정에 대한 서술에서 이런 관점은 더욱 확실해진다. 하급승려 출신이던 궁예가 대권을 잡게 된 것은 호족간의 영역싸움에서 다양한 전략전술을 구사한 지장으로서의 면모 때문이었다고 보았고, 894년 피를 흘리지 않고 명주를 점령해 장군으로 추종받은 것이나 중부권 실력자 양길의 수하에서 급속히 세력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사사로움 없이 위아래를 대하는 통치자적 자질에 힘입은 바 크다는 저자의 견해가 드러나 있다.



896년 철원에 도읍하고 국호를 고려로 정한 궁예는 임금을 칭하며 관제를 신설한다. 이후 국호를 대동방국과 통일천하를 각각 뜻하는 마진과 태봉으로 잇따라 바꾼 사실을 들어 변덕이 심했다고 하지만 이 책은 자주와 민족단합을 모색하려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또한 골품제 대신 능력에 따른 관직등용제도를 신설한 것이나 독자 연호 사용과 거란과의 적극적인 통교정책 등도 궁예의 혁명가적 성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재조명했다. 심지어 원주-영주-명주-간성-한계령-인제-철원-서해로 이어지는 정벌로를 '궁예의 길'이라 명명하고 국토개척자라는 별호를 주었다.



흥미로운 것은 궁예의 몰락배경에 대한 서술이다. 사서에서는 궁궐건축을 위해 무자비하게 조세를 거두고 부인을 비롯한 많은 신하들을 참살하는 등의 학정을 지목하지만, 이 책은 기득권층이던 고구려계 호족들과의 불화를 주시한다. 송악에서 철원으로의 재천도와 청주주민의 수도이주정책 등으로 위기감을 느낀 기득권 세력들이 왕건의 쿠데타를 부추겼다고 추론했다.



차 례

머리말 궁예의 겉옷을 벗겨라

1장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쇠둘레 '철원'으로부터 시작하는 까닭

소설과 역사의 경계에서

단재가 못다 그린 일목대왕의 철퇴

2장 서자 궁예, 수원승도 궁예, 호족 궁예

어린 궁예에 대한 세 가지 왜곡

경문왕의 서자? 장보고의 외손자?

중도 아닌 속인도 아닌 수도승

기댈 곳은 호족이다.

3장 반신라의 기치를 들다

대호족 양길과 함께

신라 왕의 초상을 칼로 치다

특별한 해, 894년

'막부장군'론

우회 전략, 서진에서 북진으로

3년 만에 홀로 선 성공의 비결

'궁예의 길'

4장 궁예의 꿈

킹 메이커 왕건가와의 만남

'고려의 왕'임을 재천명하다

5장 미륵의 나라

세력전쟁에서 통일전쟁의 대열로

국호와 연호에 담긴 궁예가 꿈꾸던 세상

궁예의 수덕, 왕건의 수덕

다시 읽는 궁예식 제도와 관계

궁예의 미륵사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재조명되어야 할 궁예식 국제관계

6장 궁예 최후의 재해석

정사 속의 최후, 전설 속의 죽음

왕건 역모 계획의 비밀, 9층 금탑

청주인 1천 호를 옮겼으나

궁예 몰락의 신호탄, 아지태 사건

몰락의 상징, 궁예 도성

끝내 실패한 민생고 해결

통일의 길목에 선 세 영웅

궁예가 남긴 자취를 따라

궁예와의 만남을 끝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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